청도 운강고택과 만화정 ( )

주생활
유적
문화재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밀양박씨 가문의 박정주, 박시묵, 박순병이 조성한 청도 신지리에 있는 저택과 정자.
유적/건물
건축 양식
튼ㅁ자집, ㄱ자집
건립 시기
19세기
건물 층수
단층
규모
2필지/5,048㎡
소재지
경상북도 청도군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가민속문화재(1979년 12월 31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청도군
내용 요약

청도 운강고택과 만화정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밀양박씨 가문의 박정주, 박시묵, 박순병이 조성한 청도 신지리에 있는 저택과 정자이다. 운강고택은 유력한 가문이 여러 대에 걸쳐 세거하며 경영한, 남부 지방 대규모 저택이 잘 보존된 중요한 사례이다. 만화정은 조선 후기 본가와 떨어진 경관 좋은 곳에 경영한 정자이면서, 사랑채의 연장선, 강학소의 역할 등을 하였다.

정의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밀양박씨 가문의 박정주, 박시묵, 박순병이 조성한 청도 신지리에 있는 저택과 정자.
건립 경위

운강고택(雲岡故宅) 집터는 청도 신지리에 세거한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오랜 기간 써 온 자리이다. 현재의 운강고택은 성경당(誠敬堂) 박정주(朴廷周, 1789~1850)가 형제끼리 분가하면서 1829년(순조 29)에 집을 지어 현재와 비슷한 모양을 갖추었다고 한다. 1844년(헌종 10)에 박정주의 아들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 1814~1875)이 사랑채를 신축한 것과 같이 크게 중건하였고 1864년(고종 1)에는 주14를 신축하였다. 박시묵은 영남의 대학자들과 교류하고 주16 주15주19을 받는 등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호를 따서 집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만화정(萬和亭)은 박시묵이 운강고택 인근에 1864년 건립하여 학문을 닦고 강론하던 주17이다. 만화정(萬和亭)이라는 이름은 정자 앞에 있는 들판의 이름인 만화평(萬花坪)에서 중간의 꽃 화(花)를 화할 화(和)로 바꾸어 붙인 것이라 주1.

변천

박시묵의 아들 진계(進溪) 박재형(朴在馨, 1838~1900)이 중사랑채 뒤에 1870년(고종 7)경 주18인 백류원(百榴園)을 조성했으나 현재는 사라졌다. 박시묵의 주20인 청초 박순병(朴淳炳, 1893~1944)이 1912년에 운강고택과 만화정을 주33. 현대에 들어와 1979년에 국가민속문화재로 등록된 이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형태와 특징

운강고택은 튼ㅁ자 두 개에 9동의 주34이 결합한 대저택이다. 전체적으로 옥토산을 주21으로 동창천 너머의 은광산을 주22으로 바라보며 북서향한다. 두 ㅁ자 영역은 각각 주35주36를 중심으로 한다. 별도의 영역을 이룬 주37을 합치면 품(品)자형으로 볼 수도 있다.

사랑채 영역에선 북서향한 주38와 마주보는 중사랑채, 남서향한 사랑채와 마주보는 주39가 사랑 주23을 둘러싼다.

사랑채는 집안 어른의 공간이며, 안채 영역과의 경계에 T자형으로 놓여 있다. 정면 5칸 중 왼쪽의 네 칸에는 주40 뒤로 대청과 주42을 좌우로 꾸몄다. 사랑방 우측의 맨 끝 칸은 주43 방인데 그 뒤로 만든 다락은 문서 수납 공간이자, 사당을 짓기 전 주24를 모신 중요한 장소이다. 사랑방 뒤로 안채 쪽으로 뻗은 T자 돌출부는 뒷사랑방인데 손님, 특히 안채 여성들을 방문한 친정 식구가 주25 데에 쓰였고, 주44 때엔 주45주26을 치르는 공간 등으로 썼다.

중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一자집이고 가운데에 있는 중사랑방의 좌우로 주27주28을 두었다. 중사랑채는 집안과 마을의 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곳으로 사랑채와 독립되도록 배치하였다. 중사랑채 뒤 백류원 옛터 너머로 담장을 두른 사당이 있는데, 이곳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3량가 주2으로 된 집이다.

대문채는 밖에서 볼 때 솟을대문 우측으로 머슴의 주30 방, 주31, 외양간, 왼쪽에 사랑채 주인과 손님을 위한 화장실이 붙어 있다. 사랑채 맞은편의 광채에는 4칸의 창고와 1칸의 마구간, 화장실이 들어서 있다.

안채 영역은 사랑채 뒷사랑방 뒤로 길게 붙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안곳간과 그 맞은편에 북서향한 안채, 사랑채 집사 방 우측으로 나란히 놓인 주46와 그 맞은편의 주32로 구성되고 안채 뒤로는 후원 공간이 있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5칸의 一자집인데 좌측부터 부엌, 큰방, 대청, 작은방이 이어진다. 부엌 문과 창호의 위치, 집 뒤편으로 반 칸 깊이로 이어지는 발효 식품을 만드는 내방, 식품을 보관하는 차방, 찬방 등이 작업의 편의와 큰방에서의 감독, 물건의 수납에 유용하도록 이루어져 있다.

중문채는 사랑 마당을 통해 주47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발효 식품과 잡곡을 저장하는 데에도 쓰였다. 안 곳간은 추수한 곡식을 보관하는 장소였고 뒷사랑과 연결되는 1칸에 따로 문을 내어 안채에서 사랑채를 거치지 않고 출입할 때 썼다. 하인들의 공간인 행랑채에는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거주를 위한 방과 부엌, 왼쪽에는 곳간과 방앗간, 화장실을 두었다.

만화정은 운강고택에서 북쪽으로 약 300미터 떨어진 동창천 동쪽 주48 숲속의 언덕 위에서 남서향으로 동창천을 조망한다. 작은 주3인 유도문을 들어서면 높은 주49 위에 올라선 ㄱ자 주4의 만화정이 있고 만화정 뒤로는 주50와 후원(後園)을 꾸몄다. 만화정의 우측에는 一자집인 아래채와 관리사, 창고가 남서쪽으로 열린 마당의 세 변을 둘러싼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만화정의 ㄱ자중 긴 변인 본채에는 우측의 2칸짜리 큰 방과 1칸짜리 좁은 대청과 왼쪽 꺾임부의 작은 방이 있다. 짧은 변 쪽은 동창천을 조망하는 2칸 규모의 주5를 꾸몄다. 누마루 기둥과 두 칸방 전면 기둥 2개를 원기둥으로 꾸미고 나머지는 주51의 기둥을 놓았다. 지붕 구조는 본채는 3량가, 누마루는 5량가로 꾸미고 화반대공(花盤大工)을 올렸다. 입면 구성에서 본채는 주6를 올리고 2칸 방 전면에 주7을 쓴 반면, 누마루는 익공(翼工)을 올리고 둘레에 주8주9을 달아 더 강조하였다. 누마루 천장은 주10 끝에 주52, 눈썹 주53와 꽃무늬의 주54로 장식하였다. 처마는 홑처마이지만 주11 밑에 주12를 받쳤고, 추녀 끝에 주13와 활주의 주55을 설치하였다.

의의 및 평가

운강고택은 남부 지방의 부유한 가문이 주56 대규모의 저택에서 주57주58의 분별을 반영한 동선과 주59을 배치하고, 각종 기능의 원형이 잘 보존된 중요한 사례이다. 만화정은 조선 후기 본가와 떨어진 경관 좋은 곳에 경영한 정자의 예이면서, 운강고택 사랑채의 연장선이자 강학소(講學所)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우원 편, 『경상북도 문화재도록』 3(동해문화사, 1995)
전국건축문화자산 자료조사 행사위원회, 『전국건축문화자산 8권: 대구 경북편』(’99 건축문화의해 조직위원회, 1999)
문화재청, 『한국의 전통 가옥 기록화보고서』 22(문화재청, 2007)

논문

정진희, 『조선 후기 상류 주거의 공간 사용에 관한 연구: 청도 운강고택 중심으로』(울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박시묵(http://www.grandculture.net/cheongdo)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만화정기(http://www.grandculture.net/cheongdo)
주석
주1

기존 연구, 조사에서는 1809년 박정주가 짓고 1824년 박시묵이 중건, 1905년 박순병이 중수했다 쓴 것이 많다. 그러나 1814년생 박시묵과 1893년생 박순병이 1824년 중건, 1905년 중수를 주도했다기엔 그들의 나이가 너무 어릴 때이다. 정진희의 논문 2장에 운강고택 종손 박성욱의 책을 인용정리한 1829년 박정주 창건, 1844년 박시묵 중건, 1912년 박순병 중수가 해당 인물들의 생몰년대에 더 부합한다. 만화정 건립 연대 또한 기존의 1856년 대신, 정진희 논문 2장의 1864년을 따랐다.

주2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우리말샘

주3

대문간이 따로 없이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워서 문짝을 단 대문. 우리말샘

주4

위 절반은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고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지붕. 우리말샘

주5

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 우리말샘

주6

모가 나게 만든 도리. ⇒규범 표기는 ‘납도리’이다. 우리말샘

주7

‘亞’ 자 모양으로 살을 짠 난간. 우리말샘

주8

건넌방, 누각 따위의 대청 기둥 밖으로 돌아가며 깐 난간이 있는 좁은 마루. 우리말샘

주9

난간두겁대를 받치는, 짧고 가느스름한 기둥. 위는 구부정하게 내밀고 덩굴무늬가 새겨져 있다. 우리말샘

주10

한쪽 끝은 기둥머리에 짜이고 다른 쪽 끝은 들보의 중간에 걸친 보. 우리말샘

주11

네모지고 끝이 번쩍 들린, 처마의 네 귀에 있는 큰 서까래. 또는 그 부분의 처마. 우리말샘

주12

지붕의 왕지도리 위에서 조금 내밀어 추녀 밑에 덧받침으로 댄 추녀. 추녀 밑뿌리에 붙고 사래는 추녀 끝에 붙는다. 우리말샘

주13

무엇을 받치거나 버티는 데에 쓰는 굽은 기둥. 우리말샘

주14

한집안의 사당(祠堂). 우리말샘

주15

조선 시대에, 중추원이나 승정원에 속하여 왕명의 출납을 맡아 하던 정삼품 벼슬. 태종 원년(1401)에 좌대언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이 이름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16

죽고 난 이후. 우리말샘

주17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 별장과 비슷하나 농사를 짓는다는 점이 다르다. 우리말샘

주18

집 뒤에 있는 정원이나 작은 동산. 우리말샘

주19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 종이품 벼슬아치의 부친, 조부, 증조부나 충신, 효자 및 학행(學行)이 높은 사람에게 내려 주었다. 우리말샘

주20

손자의 아들. 또는 아들의 손자. 우리말샘

주21

풍수지리에서, 묏자리나 집터 따위의 운수 기운이 매였다는 산. 우리말샘

주22

풍수지리에서,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 우리말샘

주23

사랑채 앞에 있는 마당. 우리말샘

주24

단(壇), 묘(廟), 원(院), 절 따위에 모시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 우리말샘

주25

서로 만나서 얼굴을 마주 보다. 우리말샘

주26

부모의 상을 당해 삼 년 동안 거상하는 일. 우리말샘

주27

책을 보관하는 집이나 방. 우리말샘

주28

한옥에서, 몸채의 방과 방 사이에 있는 큰 마루. 우리말샘

주30

억새나 짚 따위로 지붕을 인 조그마한 집채. 흔히 집의 몸채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지었다. 우리말샘

주31

세간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물건을 넣어 두는 곳. 우리말샘

주32

대문간 곁에 있는 집채. 우리말샘

주33

건축물 따위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치다. 우리말샘

주34

대학, 병원, 공동 주택처럼 무리를 이루어 하나의 목적을 추구하거나 같은 주소를 사용하는, 동일 건물 경계 내에 있는 건축물. 우리말샘

주35

한 집 안에 안팎 두 채 이상의 집이 있을 때, 안에 있는 집채. 우리말샘

주36

사랑으로 쓰는 집채. 우리말샘

주37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셔 놓은 집. 우리말샘

주38

대문이 있는 집채. 우리말샘

주39

안채에서 따로 떨어진, 광이 있는 집채. 우리말샘

주40

툇간에 놓은 마루. 우리말샘

주42

사랑으로 쓰는 방. 우리말샘

주43

주인 가까이 있으면서 그 집 일을 맡아보는 사람. 우리말샘

주44

부모, 승중(承重)의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와 맏아들의 상사(喪事)에 관한 의례(儀禮). 우리말샘

주45

상여가 나갈 때까지 관을 놓아두는 방. 우리말샘

주46

중문이 있는 집채. 우리말샘

주47

집 안의 안채 앞에 있는 마당. 우리말샘

주48

냇물의 주변. 우리말샘

주49

높이 쌓아 올린 대나 터. 우리말샘

주50

꽃을 심기 위하여 흙을 한층 높게 하여 꾸며 놓은 꽃밭. 우리말샘

주51

네모반듯한 모양. 우리말샘

주52

집의 합각머리나 너새 끝에 얹는, 용의 머리처럼 생긴 물건. 우리말샘

주53

지붕 밑이나 위층 바닥 밑을 편평하게 하여 치장한 각 방의 윗면. 우리말샘

주54

외기중도리(外機中道里)의 왕지부분에 내리 세운 짧은 기둥. 밑 끝에는 꽃새김을 함. 바로가기

주55

기둥 밑에 기초로 받쳐 놓은 돌. 우리말샘

주56

계획을 세워 집을 짓다. 우리말샘

주57

남자와 여자. 또는 그 차이. 우리말샘

주58

주인과 부하를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59

대소변을 보도록 만들어 놓은 곳. 우리말샘

집필자
이우종(영남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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