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남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세자시강원시강, 영흥대도호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여숙(與叔)
만곡(晩谷), 양암(養庵)
이칭
만옹(晩翁)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9년(명종 14)
사망 연도
1619년(광해군 11)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정랑|영흥대도호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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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세자시강원시강, 영흥대도호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흥숙(興叔). 호는 만곡(晩谷)·만옹(晩翁)·양암(養庵). 장사랑 최명손(崔命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최업(崔嶪)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 최수준(崔秀俊)이며, 어머니는 증호조참의 남상질(南尙質)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학문과 재행이 뛰어났으며,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태학에 입학하였다. 당시 호남 선비들이 올린 언사(言事)가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그들이 하옥되자 태학생들이 상소할 때 소두(疏頭)가 되어 구원하였다. 1600년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어 왕세자의 학문을 잘 이끌었다.

1602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병조좌랑·지제교(知製敎)·시강원사서와 형조·예조·병조의 정랑을 두루 역임하고, 1605년 함경북도평사로 나갔다. 이듬해 내직에 들어와 예조·병조의 정랑과 세자시강원시강 등을 역임하고, 1612년(광해군 4)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계되어 영흥대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에 의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는 옥사가 일어났는데, 그에 연루되어 삭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가평에 은거하여 만곡정사(晩谷精舍)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선조 때는 군정(軍政)에 관한 많은 상소를 올려 정치를 보좌하였고, 광해군 초기 홍문관에 있을 때에는 군국대무(軍國大務)에 대한 6조의 소를 올리는 등 여러 차례 시정혁폐(時政革弊)를 직언하였다. 뒤에 아들 최명길(崔鳴吉)의 인조반정 공훈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계곡집(谿谷集)』
『상촌고(象村稿)』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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