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흥숙(興叔). 호는 만곡(晩谷)·만옹(晩翁)·양암(養庵). 장사랑 최명손(崔命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최업(崔嶪)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 최수준(崔秀俊)이며, 어머니는 증호조참의 남상질(南尙質)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학문과 재행이 뛰어났으며,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태학에 입학하였다. 당시 호남 선비들이 올린 언사(言事)가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그들이 하옥되자 태학생들이 상소할 때 소두(疏頭)가 되어 구원하였다. 1600년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어 왕세자의 학문을 잘 이끌었다.
1602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병조좌랑·지제교(知製敎)·시강원사서와 형조·예조·병조의 정랑을 두루 역임하고, 1605년 함경북도평사로 나갔다. 이듬해 내직에 들어와 예조·병조의 정랑과 세자시강원시강 등을 역임하고, 1612년(광해군 4)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계되어 영흥대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에 의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는 옥사가 일어났는데, 그에 연루되어 삭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가평에 은거하여 만곡정사(晩谷精舍)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선조 때는 군정(軍政)에 관한 많은 상소를 올려 정치를 보좌하였고, 광해군 초기 홍문관에 있을 때에는 군국대무(軍國大務)에 대한 6조의 소를 올리는 등 여러 차례 시정혁폐(時政革弊)를 직언하였다. 뒤에 아들 최명길(崔鳴吉)의 인조반정 공훈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