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순(亮詢)’이라고도 표기한다. 흥덕왕이 죽은 뒤 벌어진 왕위계승전에서 김제륭(金悌隆)이 김균정(金均貞)을 죽이고 희강왕이 되자, 김균정을 지지하던 김예징(金禮徵)과 함께 837년(희강왕 2)에 장보고(張保皐)에게 투탁하였다.
『삼국사기』김양전(金陽傳)에는 838년(민애왕 1) 12월에 무주군(鵡洲軍)을 거느리고 김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에게 투탁하였다고도 한다.
839년 김양이 평동장군(平東將軍)이 되어 우징군의 선봉으로서 민애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왕을 살해하자, “본래의 목적한 원수를 갚게 되었으나 지금 괴수가 죽음으로써 모든 관리와 백성들이 안정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권고하며, 김양을 왕성으로 들어가게 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우징은 즉위하여 신무왕이 되었으나, 곧 죽고 태자가 문성왕이 되었다. 840년(문성왕 2)에 김예징이 상대등(上大等)이 되자 이찬(伊飡)에 임명되었으며, 843년에 시중에 올랐다.
그러나 다음해 시중직에서 해임되고, 847년 5월에 파진찬(波珍飡) 흥종(興宗) 등과 함께 모반하였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이는 846년에 행해진 장보고세력의 제거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