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만고(萬古), 호는 이면(易眠). 김정헌(金廷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몽호(金蒙虎)이고, 아버지는 승지 김중청(金中淸)이며, 어머니는 이영승(李永承)의 딸이다.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4년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제수받았다. 이듬해 정언(正言)이 되었다. 아버지가 광해군을 모신 신하라고 하여, 간원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류(金瑬)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해 정언이 되었으며, 그 뒤 지평(持平)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의 강도파천(江都播遷: 강화도로 피난함)에 따라가지 않았다고 하여 탄핵을 받았다. 1632년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있을 때, 온 집안이 큰 변을 만나 숙부가 옥에 갇히고 할머니는 자살하였으며 김주우도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서예에 명망이 있어 13세에 진주 촉석루의 액(額)을 썼으며, 1625년에 왕명으로 동궁의 대병(大屛: 큰 병풍)에 사잠(四箴: 네 가지의 잠언)을 쓰기도 하였다. 인조는 즉위하기 전부터 그 재질을 알고 발탁하여 쓰고자 하였으나, 아버지와 숙부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하급직에 머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