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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요

    구비문학개념용어

     어린이들의 꿈과 의욕을 담고 있으면서 어린이들에 의해 불리는 어린이들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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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중 동요집
    분야
    구비문학
    유형
    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어린이들의 꿈과 의욕을 담고 있으면서 어린이들에 의해 불리는 어린이들의 노래.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동요의 바탕에는 단순·보편성 및 이상(理想)과 몽환(夢幻)이 담긴 낭만주의적 요소와 함께 윤리성·교육성으로 집약되는 인도주의적 요소가 있다.
    동요는 언제 누가 지었는지 알려지지 않은 채 전래되어 온 전승동요(傳承童謠 : 口傳童謠·傳來童謠라고도 한다)와, 어른이 어린이들을 위해 창작한 창작동요(創作童謠)로 나뉜다.
    전승동요는 민요·설화·속담 등과 더불어 구비문학(口碑文學)에 속하며, 내용은 자연의 변화를 노래한 것이 많고, 유희를 하면서 부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창작동요는 동시(童詩)·동화(童話)·동극(童劇) 등과 더불어 아동문학에 속한다.
    따라서 전승동요는 말과 귀로써 전해지는 공동 참여의 문학으로서 노래 또는 중얼거리는 말로써 구연(口演)됨에 비해, 창작동요는 개인의 창작으로서 문자를 통해 발표되고 어린이나 동심을 지닌 어른들에 의해 읽히거나 노랫말로 불린다.
    창작동요는 일단 발표되면 그대로 고정되지만, 전승동요는 아득한 세월을 쉼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고 여러 지방으로 전파되어 나가는 사이에 그 시대나 환경에 맞도록 일부 개작되기도 한다.
    다같이 어린이를 주인으로 하면서도 전승동요와 창작동요는 이처럼 구승(口承)과 기록, 공동 제작과 개인 창작 등 그 속성이 다르다.
    다만 아동문학의 원류나 소재는 역시 구비문학에서 찾아야 마땅하다는 점에서 전승동요와 창작동요의 관련성은 깊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전승동요는 전승동화와 함께 아동문학의 한 갈래로 다룰 수도 있다.
    동요는 구비문학 가운데에서도 노래라는 점에서 민요와 그 성격이 비슷하므로 넓은 뜻의 민요에 포괄되기도 한다. 다만 민요는 서민 생활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그들의 실생활과 밀착되지만, 어린이들의 꿈을 노래하는 동요는 서민의 현실 생활을 노래하는 데 역점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바탕이 서로 다르다.
    또 민요는 노동이나 의식을 원활하게 치르게 한다는 기능적 성격이 뚜렷하지만, 유희 위주인 동요에는 노동요(勞動謠)나 의식요(儀式謠) 등이 없다.
    세계의 어린이들은 어린이라는 점에서 공통된 요소를 지니므로 동요는 어떤 면에서 세계성도 지니게 되지만, 민요는 그 지역의 생활 실정을 충실히 반영하므로 두드러지게 지역성을 띤다. 또한 어린이들은 성(性)의 차이를 별로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동요에는 민요의 경우와 달리 남요(男謠)·부요(婦謠)의 구별이 없다.
    또한 전래동요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불린다는 특성 때문에 민심을 대변하기도 하여, 앞날의 조짐을 예언하는 참요적(讖謠的) 성격을 지니기도 하였다. 참요(讖謠)는 왕실이나 나라의 흥망성쇠에 관련된 것이 그 주류를 이룬다.
    예를 들어 「목자득국 木子得國」이라는 노래는 ‘목(木)’자와 ‘자(子)’자를 합치면 ‘이(李)’자가 되니 ‘이씨(李氏)’가 장차 나라를 세우리라는 요참으로 본다.
    곧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李成桂)가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한 동요라고 풀이되는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거두었을 때 군졸들이 함께 이 노래를 불렀다 한다.
    동요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어린이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을 만큼 신기한 것으로 여겨졌다. 향가 「서동요 薯童謠」도 백제의 무왕과 선화공주가 혼인할 것을 예언한 동요로 볼 수 있다.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조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요참적 동요가 문헌상에 한문으로 전해져 온 것은 민간에서 이 요참의 효험을 신앙처럼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전승동요는 동식물요(動植物謠)·천체기상요(天體氣象謠)·유희요(遊戱謠)·풍소요(諷笑謠)·어희요(語戱謠)·자장가·기타요(其他謠) 등으로 나누어진다. 동식물이나 천체 기상을 노래한 것은 다같이 자연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자연요(自然謠)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도 있다.
    그리고 풍소요나 어희요는 일종의 말놀이이기 때문에 넓은 뜻으로 보면 유희요에 포함시킬 수도 있으므로 결국 전승동요는 자연요와 유희요로 크게 나누어 볼 수도 있다.
    “해야해야/붉은해야/김칫국에/밥말아먹고/장구치고/나오너라”(함경북도)나 “아버지는/덩굴동이/어머니는/잎동이/아들은/덩드렁동이/딸은/꽃동이”(제주도) 같은 동요는 자연을 노래한 천체기상요와 동식물요의 예인데, 구름 속에 가리워졌던 해가 어서 배불리 밥을 먹고 시뻘겋게 얼굴 내밀기를 바라는 동요를 부르면서 어린이들은 싱그러운 꿈을 키운다.
    농가의 터 앞에 열린 호박으로 가족애(家族愛)를 그린 동요에서는 짚을 두드리는 돌판 ‘덩드렁’으로 표현된 호박과 호박꽃이 각각 아들·딸로 비유되는데, 여기에는 그 바탕에 부모로 비유되는 호박덩굴이나 호박잎이 있어 아들(호박)·딸(호박꽃)을 보호하고 키우며, 동요를 부르면서 어린이들은 알뜰한 사랑을 확인한다.
    “두껍아/집지어라/황새야/물길어라”(이천)나 “가갸/가다가/거겨/거렁에/고교/고기잡아/구규/국끓여서/나냐/나하고/너녀/너하고/노뇨/노너먹자”(충청북도)와 같은 유희요와 어희요의 예를 보면, 이 노래들은 어린이들이 여름날 바닷가에서 모래로 집짓기 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동요로, 집을 새로 지으려면 이웃이 모여 함께 물을 길어와야 하고 힘을 합해야 함을 되풀이하여 부르는 사이에 서로 돕는 협동 의식을 드높인다. ‘가갸 가다가’로 시작되는 어희요에도 은연중에 이웃 사이의 정이 담겨 있다.
    자장가는 젖먹이 어린애를 대상으로 하는 노래이지만, 이를 부르는 주체가 어린이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할머니 등 어린애를 돌보는 어른들이라는 점에서 다른 동요와는 달리 민요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곧 자장가는 아기를 재우거나 어르는 기능이 분명하고 사설 내용을 아기에게 들려주기 위하여 어른들이 부른다는 점에서 어린이들이 부르는 다른 전승동요와는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전승동요의 바탕에는 단순·보편성과 평명성(平明性)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사설 내용에는 어린이들의 보랏빛 꿈과 민주적인 수평의식 및 상부호혜의식(相扶互惠意識), 사물을 밝게 보는 쾌랑성(快朗性)과 낙천성이 들어 있다. 따라서 전승동요는 어린이들에게 밝고 따뜻한 마음으로 꿈과 사랑을 가꾸게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전승동요에 대한 독자적이며 본격적인 수집·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직까지 1933년 김소운(金素雲)이 펴낸 『조선동요선 朝鮮童謠選』, 1940년에 펴낸 『구전동요선 口傳童謠選』과 1962년 박두진(朴斗鎭)이 펴낸 『한국전래동요독본』 등이 있는 정도이지만, 이들 역시 본래 전승동요를 집중적으로 수집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전승동요는 흔히 민요의 서자격(庶子格)으로 취급되어 민요집 속에 전승동요를 함께 수집, 정리해 왔다. 전승동요를 대폭 포괄한 민요집으로는 『조선구전민요집 朝鮮口傳民謠集』과 1948년 김사엽(金思燁) 등이 낸 『조선민요집성 朝鮮民謠集成』, 1965년 김영돈(金榮敦)이 펴낸 『제주도민요연구(상) 濟州島民謠硏究(上)』와 1981년부터 임동권(任東權)이 펴낸 『한국민요집 韓國民謠集』 Ⅰ∼Ⅵ 등이 있다.
    이 밖에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韓國民俗綜合調査報告書』 등 각종 조사 보고서에 띄엄띄엄 그 자료가 소개되었을 뿐이다. 그 연구 역시 본격화되지 않아 주왕산(周王山)의 『조선민요개론 朝鮮民謠槪論』 및 임동권의 『한국구비문학사(하) 韓國口碑文學史(下)』에서 주로 참요를 논의했고, 1982년 『한국민속대관 韓國民俗大觀』 동요편에서 비로소 그 실상과 수집 연구사를 정리했을 뿐이다.
    동요는 형식상 음악성이 강한, 어린이를 위한 정형시로서 그 시원은 노래이며, 외형률, 특히 음수율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불려지는 노래의 내용, 곧 노랫말이다. 동요는 원시시대 미분화 예술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민요라는 큰 줄기 속에 자리잡아 온 구전동요가 그 첫 형태였다. 구전동요는 민중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래되다가, 현대에 이르러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가진 창작동요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전래동요가 아동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소박한 노래로서 소극적인 입장에 머문 데 비하여, 오늘날의 동요는 아동이라는 주체를 재인식하고 그 인간성 형성을 위하여 중요한 장르로 부각되었다. 근대의 창작동요는 갑오경장 이후에 나타났는데 창가와 일본 동요의 영향을 받아 4·4조 형식에서 차차 7·5조로 바뀌게 되었다.
    이미 고전이 된 방정환(方定煥)의 창작동요 「늙은 잠자리」(1924), 윤극영(尹克榮)의 「반달」(1924), 유지영(柳志永)의 「고드름」(1924), 박팔양(朴八楊)의 「까막잡기」(1924), 한정동(韓晶東)의 「따오기」(1925), 서덕출(徐德出)의 「봄편지」(1925), 윤석중(尹石重)의 「오뚜기」(1925), 이원수(李元壽)의 「고향의 봄」(1926) 등은 동요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한국 현대 아동문학 성립기의 작품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요는 양적인 팽창을 이루며 시성(詩性)을 가미한 예술적 동요의 창작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유도순(劉道順)·윤복진(尹福鎭)·신고송(申孤松)·김태오(金泰午)·강소천(姜小泉)·박영종(朴泳鍾)·권오순(權五順) 등 시인들에 힘입어 광복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아동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1932년에 나온 『윤석중동요집』은 한국 최초의 창작동요집이었으며, 이어 김태오의 『설강(雪崗)동요집』(1933)·강소천의 『호박꽃 초롱』(1941) 등 동요집이 출간되었다. 방정환의 동요는 애상적이었고, 윤석중·윤복진·강소천 등은 순수동심주의를 지켰으며, 이원수는 초기부터 사회 저항으로 일관하였다.
    광복 이후 혼란기에 나온 권태응의 동요집 『감자꽃』(1948)과 윤복진의 동요집 『꽃초롱꿈초롱』(1949)은 기념할 만한 작품이었다. 특히 권태응의 동요는 사소한 것에서 동심적 진리를 포착해 낸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6·25를 거쳐 1960년대에 이르면서 동요는 주류의 자리를 동시에 내어주게 된다. 동요 시인들이 정형시인 동요보다는 자유시인 동시에 문학적 역량을 실으려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1960년대에 와서는 신춘문예에서조차 동요를 현상 모집하지 않게 되었고, 응모자도 없게 되어 작가의 역량 평가에서 제외되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동요는 음악에 예속되어 노랫말의 역할만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시류 속에서도 어효선(魚孝善) 등은 동요 문학의 부흥에 애써 왔고, 신현득(申鉉得)·김종상(金鍾祥)·엄기원(嚴基元) 등이 동요집을 엮어내기도 하였다.
    서양 음악이 우리 나라에 도입된 뒤 서양 음악 형식에 따라 작곡된 첫 창작동요는 윤극영이 작사·작곡하여 1924년에 발표한 「반달」이다.
    서양 음악이 우리 나라에 도입되기 이전부터 우리 겨레가 즐겨 부르던 노래 중에는 전래동요가 있어 민요와 함께 오래 전부터 불려 왔다. 「새야새야 파랑새야」·「달아달아 밝은달아」·「강강수월래」·「동무동무 씨동무」 따위는 널리 알려져 있는 우리 나라의 전래동요이다.
    이러한 전래동요들은 작사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려지지 않았으며 대개 시조가(時調家)나 문필가가 즉흥적으로 말을 지어 우리의 고유 음계인 5음계의 단조로운 가락에 실어 퍼뜨리면, 그것이 사람들의 귀와 입을 통해 퍼져 나갔으리라 생각된다.
    민요와 마찬가지로 전래동요도 백성들의 민심을 읊은 노래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옮겨 퍼져 세월을 따라 흘러 내려온 것이다.
    전래동요의 노랫말을 보면 그 시대상이 노래로 잘 표현되어 있다. 전래동요는 단순한 가락에 옮겨져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퍼져 나갔기 때문에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라지기도 하고 또 일부 수정되어 전해 내려오기도 하였다. 그래서 전래동요를 구전동요라고도 한다. 민요나 전래동요의 가락은 매우 쉽고 단순하므로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쉽게 익혀 부를 수 있다.
    역사가 말해주듯 우리의 옛 조상들은 어렵고 괴로운 일을 많이 겪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조상들은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노래로 읊었으며,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고 남이 하는 노래를 귀담아 듣고는 이를 즐겨 따라 부르면서 마음을 달래곤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동요의 개념은 상당히 변하였다. 서양 음악이 도입된 지 100여 년이 되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동요라고 하면 서양 음악 형식으로 작곡하고 서양 음악 형식으로 가창(歌唱) 지도를 한다.
    동요는 예술적인 동요, 교육적인 동요, 생활 감각의 동요 등으로 구분되어 있고, 창법도 각양각색이며 독창·중창·합창으로 다양하게 불려진다.
    우리 나라의 동요는 서양의 동요보다 훨씬 예술적이고 그 수도 상당히 많다. 서양의 동요는 대개 보육(保育) 또는 교육적 목적으로 창작되고 교육에 이용되는 것이 통례이나, 우리의 동요는 역사성과 민족성이 깃들어 있고 철학적이며 예술성이 풍부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동요 창작인들이 일제하에 민족 항쟁이나 민족 감정의 간접적인 표출 수단으로 동요를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겨레의 미래를 짊어질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려는 목적으로 동요를 창작해 왔기 때문이다.
    광복 후에는 나라 사랑의 마음을 담은 동요가 많이 작곡되었으며, 6·25사변시에는 승전 의식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였고, 오늘날에는 정서 순화를 위한 서정동요와 예술동요가 많이 작곡, 애창되고 있다.
    창작동요의 효시는 1924년에 발표된 「반달」인데, 이 노래가 나오기 이전에는 창가라고 하여 찬송가나 일본식 곡조에 우리말을 적당히 지어 붙여 젊은이·어린이 구별 없이 불러오다가 「반달」이 발표되면서 예술가곡·대중가요, 그리고 동요로 확실히 구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국 창작동요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1923년 방정환이 제창한 어린이문화운동이 색동회에 의해 전개되자 윤극영은 색동회의 일원으로서 나라를 빼앗긴 이 땅의 어린이에게 “아름다운 꿈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동요를 창작하여 어린이로 하여금 부르게 하자.”고 주장, 노래 단체인 ‘따리아회’를 서울에서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윤극영은 「반달」·「따오기」·「고드름」·「설날」·「귀뚜라미」를 비롯한 수많은 동요 창작에 몰두하였다. 이 같은 정열은 그가 만주 북간도로 이주하는 1927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주 후에도 「제비남매」·「고기잡이」 등을 작곡하였다.
    대구의 박태준(朴泰俊)은 1925년부터 「오빠생각」·「맴맴」·「밤한톨이 떽떼굴」·「오뚜기」 등 오늘날에도 널리 애창되는 동요를 작곡하였다.
    1927년에는 예술가곡의 효시인 「봉선화」의 작곡자이자 양악 발전에 선구자적 구실을 한 서울의 홍난파(洪蘭坡)가 어린이에게로 시선을 돌려 동요 작곡에 전력을 투구하였다. 정순철(鄭淳哲) 또한 1920년대 후반기에 활약하여 「짝자궁」 같은 후세에까지 불리는 동요를 작곡하였다.
    1924년부터 1930년까지를 동요의 개척시대라고 한다면 1931년부터 1939년까지는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현제명(玄濟明)이 「가을」·「고향생각」을 작곡하고 이흥렬(李興烈)이 「꽃동산」·「나비나비 흰나비」를 비롯한 수많은 동요를 창작하였다.
    또한 김동진(金東振)과 강신명(姜信明)·박태현(朴泰鉉)은 평양에서 동요 작곡에 주력하고, 이일래(李一來)는 마산에서, 권태호(權泰浩)·김성태(金聖泰)·김성도(金聖道)·유기흥(柳基興)·원치승(元致升)은 서울에서 젊은 열의로 동요 창작에 전심하였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또 라디오 방송에서 동요가 보급, 애창되기 시작하자 당황한 일제는 1940년 초부터는 우리말 말살 정책을 펴는 등 군국주의적 기승을 부렸고, 우리 동요의 가창을 금지하며 학교나 방송에서 일본 군가나 국민가요 따위만을 가르치도록 강압 정책을 펴 나갔다. 이 시기를 암흑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중 창작, 발표된 우리 동요는 단 한 편도 없다.
    광복이 되자 묻혀 있던 우리 동요가 되살아나고, 새로운 기풍의 동요가 속속 창작되었다. 박태준·윤극영·정순철 등 개척시대의 작곡가들이 다시 동요를 작곡하기 시작했고, 안병원(安丙元)·권길상(權吉相)·정세문(鄭世文) 등 젊은 음악도들이 어린이 노래 지도에 정력을 쏟는 한편, 동요 작곡에 힘을 다하였다. 박재훈(朴在勳)·장수철(張壽哲)의 작품도 광복 직후부터 6·25 전까지 상당히 많이 발표되었다.
    6·25 때 김성태·윤용하(尹龍河)·김순애(金順愛)·나운영(羅運榮)을 거쳐, 수복 후에는 김대현(金大賢)·손대업(孫大業)·한용희(韓龍熙)·이계석(李啓奭) 등이 작곡에 힘을 기울였다. 국정 음악 교과서가 개편되고 KBS에서 ‘밝은 노래 고운 노래를 어린이에게’라는 캠페인을 벌인 결과 상당수의 새 노래가 방송을 통해 보급되었다. 알찬 동요가 쏟아져 나오고 사회, 학교, 가정에서의 동요에 대한 인식도 새로워졌다. 이 시기를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김규환(金奎桓)·이호섭(李湖燮)·이수인(李秀仁)·유병무(劉炳武)·김공선(金公善)·김숙경(金淑卿)·김방옥(金芳玉) 등이 새로운 감각과 형식의 동요곡, 특히 동요 합창곡을 개발하였다.
    동요의 예술성을 드높이는 일련의 음악적 활동이 활발했던 것도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근래의 일이었다. 동요의 합창 교육은 물론, 동요 합창의 교향악단 협연도 여러 차례 시도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동요 합창의 수준도 세계적이라 할 만큼 향상되었다. 우리 나라 어린이합창단의 첫 해외 순회 연주는 1954년 안병원이 지휘하는 한국어린이합창단이 미국을 순회 연주한 것이다. 1962년부터는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이 거의 연례적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순회 연주했는데, 최근까지 윤학원(尹鶴元)이 지휘를 맡아 하였다.
    유병무가 지휘하는 리틀엔젤스예술단도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연주했는데, 최근에는 김일권(金一權)이 지휘하고 있다. 백천웅(白天雄)이 지휘하는 서울시립소년소녀합창단, 추응운(秋應雲)이 지휘하는 한국아카데미소년소녀합창단도 각각 해외 연주를 하면서 한국 동요 합창의 우수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우리 동요 80년의 발자취는 결코 순탄하게 이어져 온 것만은 아니지만, 상당한 발전을 이루어 탄탄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동요 발전에 이바지한 아동문학가·작곡가·음악교육자와 어린이를 사랑하는 음악 연주가들의 애정 어린 헌신이 오늘의 우리 동요를 값지게 하고 빛을 보게 한 것이라 할 것이다.
    1980년에서 2000년에 이르는 동안 동요음악의 세계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거듭해 왔다. 동요의 일반적인 개념이 아이들이 부르는 단순한 가창이라는 차원에서 ‘교육문화’적인 가치, ‘생활문화’로서의 가치, 또한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문화’로서의 가치로 확대되면서 효율적인 동요보급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한국 동요 음악의 역사성 고찰도 심도있게 탐구해 왔을 뿐 아니라 현대사회에서의 동요의 가치관이 매우 넓게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거센 파급으로 어린이들에게 정서상의 나쁜 영향을 주게 된 것도 오늘날의 현실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6년)
    김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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