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조선 제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능.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조선 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성종|정현왕후
소재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서울 강남구 선릉로100길 1 (삼성동)
내용 요약

선릉(宣陵)은 조선 제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능이다. 왕릉과 비릉이 동서쪽 다른 언덕 위에 각각 조성되어 있어서 동원이강(同原異岡) 형식이다. 성종 선릉은 『국조오례의』에 가장 부합하게 건립한 조선 왕릉이며, 이후 16세기 왕릉 조영의 기준이 되었다. 사적 서울 선릉과 정릉으로 지정되어 있다.

정의
조선 제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능.
건립 경위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1494)이 1494년 12월 24일에 승하하자 왕릉의 자리를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1444)의 묫자리로 정하고, 1495년 4월 안장하였다.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는 1530년 승하하자 성종릉 왼쪽 청룡 자락에 안장하였다.

성종릉은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의 주1를 따라 돌방을 만들지 않았으나, 대신들의 건의에 따라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이 주2은 설치하게 하였다.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이 사대석을 해야 아름다우나 부서지게 되면 보수해야 하고 분묘가 요란스러워지니 미안하며, 사대석을 하지 않은 곳이 많으니 설치하지 않게 하였다. 그래서 정현왕후릉은 난간석(欄干石)만 설치되어

병풍석주3 건립 유무를 제외하면 성종릉과 정현왕후릉의 석물은 종류와 수량이 동일하다.

변천

성종과 정현왕후의 선릉과 중종 정릉은 임진왜란 중인 1592년에서 1593년경 왜적에 의해 도굴되었다.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을 보면 성종릉과 정현왕후릉은 능 내부의 것을 모두 가져가고 재궁(梓宮, 관)을 불태웠다고 한다.

형태와 특징

봉분 주위에 주4), 주5이 있고, 곡담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주6과 장명등(長明燈)을 배치하고 좌우에 주7, 주8, 주9, 석마(石馬) 등을 세웠다. 동원이강일 경우 주10을 두 능의 중앙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선릉은 그대로 성종릉 앞에 두었다.

선릉에는 현재 정자각과 비각(碑閣), 수복방(守僕房), 주11 만이 남아 있지만 『 춘관통고(春官通考)』와 『선릉지』에는 이외에도 주12, 주13, 주14, 안향청(安香廳: 제사에 쓰는 향을 보관하는 곳) 등이 있었으며, 재실 인근에 연못도 있었다고 한다.

금석문

선릉 비각에는 표석이 건립되어 있으며, 1754년에 정종 후릉, 문종 현릉, 세조 광릉, 예종 창릉, 덕종 경릉, 중종 정릉 표석과 함께 제작된 것이다. 이때 건립된 표석들은 앞면의 전서(篆書)는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이 쓰고, 뒷면의 주15홍계희(洪啓禧, 1703~1771)가 썼다.

의의 및 평가

성종 선릉은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록된 주16의 구성과 규격에 맨 처음으로 부합하는 왕릉이다. 특히 성종 선릉 장명등 뚜껑돌에는 환기구가 위아래로 뚫려 있는데, 이것은 『국조오례의』를 반영한 결과이다. 석물의 규모가 장대해지는 것도 그 영향이며, 이후 16세기 조선 왕릉 석물의 규모가 대형으로 유지되는 이유이자 시작점이다.

참고문헌

원전

『선릉지』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춘관통고(春官通考)』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Ⅲ』(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주석
주1

임금이나 부모가 죽을 때에 남긴 명령.    우리말샘

주2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둘레에 병풍석 대신으로 둘러 세운 돌.    우리말샘

주3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4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5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6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7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8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9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10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11

능(陵), 원(園), 묘(廟), 대궐,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세워서 죽 박는다.    우리말샘

주12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    우리말샘

주13

나라의 제사를 맡아보던 관아.    우리말샘

주14

제사 때에 쓰는 그릇, 기구 따위를 넣어 두는 창고.    우리말샘

주15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    우리말샘

주16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 석인(石人), 석수(石獸), 석주, 석등, 상석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민규(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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