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중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대사간, 도승지,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군옥(君玉)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21년(경종 1)
사망 연도
1786년(정조 10)
본관
여산(礪山)
주요 관직
사간원정언|의주부윤|대사간|도승지|강원도관찰사
정의
조선 후기에, 대사간, 도승지,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군옥(君玉). 송박(宋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세진(宋世晉)이고, 아버지는 송위(宋煒)이다. 어머니는 이염(李濂)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45년(영조 21)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었다. 1748년 선릉(先陵)에 대한 국왕의 친치 제사를 올릴 때 집사(執事)로 뽑혔으나 불참하여 고신(告身: 관리에게 준 관리임명장)을 박탈당하고 성주목(星州牧)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다시 설서를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으나, 탕평책을 반대하는 소를 올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전리(田里: 재야)로 방귀(放歸: 고향으로 돌아감)되었다.

1754년 『홍문록(弘文錄)』에 등재된 뒤 부교리(副敎理)·부수찬 겸 사서(副修撰兼司書)·수찬(修撰)·문학(文學)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고, 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1761년 다시 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의주부윤이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그러나 재임 중 만상(灣商: 청나라와 국경지역에서 밀무역을 하던 상인)들의 불법적인 상업 활동을 단속하지 못했다 하여 파직되어 유배당하였다. 1763년 승지로 다시 기용되었고, 이어 대사간을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그리고 강원도관찰사로 일시 외보(外補)되었다가 돌아와 대사헌과 호조참판을 지냈다.

1770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연경(燕京)을 다녀와 다시 대사헌을 제수받았고, 종실인 학성군(鶴城君) 이유(李楡)의 비리(非理)를 탄핵하는 등 활발한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조정안에서는 세손(世孫: 뒤의 정조)의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대립이 서서히 노출되고 있었다.

1775년 벽파였던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이 세손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경연에서 세손을 업신여기는 듯한 발언을 하자, 시파인 행부사직(行副司直) 서명선(徐命善)이 이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소를 올려 조야에 심한 논란이 일어났다.

대사헌으로 벽파에 속했던 송영중은 홍인한을 비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시파측의 맹렬한 탄핵을 받고 삭출되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당했고, 10년 뒤인 1786년 (정조 10)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1834년(순조 34) 손자인 송순래(宋順來)가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청하는 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이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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