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사형(士亨), 호는 영주(瀛洲). 창평 출신. 아버지는 현감 양자징(梁子澂)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큰 뜻이 없어 대과를 치르지 않았다. 벼슬은 동몽교관(童蒙敎官)·감찰(監察) 등을 거쳐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에 그친 뒤,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 조헌(趙憲)과 같은 이는 양천운을 장래 촉망되는 인물로 보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의 명에 따라 분연히 일어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을 따르려 하였으나, 두 형이 없음을 안 고경명이 큰 뜻은 이해하지만 부모의 봉양이 우선임을 들어 거절하였다.
한때 친구인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이첨과 절교하는 의분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교우하는 이름있는 선비들이 많았는데, 특히 김상헌(金尙憲)과 교분이 두터웠다. 평소 자녀들에게도 엄하였으며 『소학』·『삼강행실록』 등으로 자녀들을 가르칠 것을 훈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