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원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후기 금군별장, 좌포도대장,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사백(斯伯)
시호
무숙(武肅)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51년(영조 27)
사망 연도
1813년(순조 13)
본관
진주(晉州)
주요 관직
금군별장(禁軍別將)|좌포도대장|삼도수군통제사
관련 사건
홍경래의 난
정의
조선후기 금군별장, 좌포도대장,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백(斯伯). 유운장(柳雲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세기(柳世基)이고, 아버지는 삼도수군통제사 유진항(柳鎭恒)이다. 어머니는 구식(具侙)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74년(영조 50) 무과에 급제한 뒤 1776년(정조 즉위년) 무과중시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1780년 평산부사를 거쳐 1782년 8월 죄인 신형하(申亨夏)를 정배할 때 이를 법대로 다스리지 않았다 하여 도배(徒配)되었다.

1785년 다시 기용되어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 승진하였고, 장용영이 설치되면서 병방(兵房)으로서 업무를 주관하였다. 1792년 평안도병마절도사를 거쳐 이듬해 우포도대장이 되었다. 그 뒤 금군별장(禁軍別將)·좌포도대장에 제수되었으나, 1797년 민가의 실화로 인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우포도대장으로 복직되었다. 이어 1804년(순조 4)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807년 다시 좌포도대장이 되었으나 수하 병졸들의 군기를 문란하게 한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1811년 다시 기용되어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박기풍(朴基豊)을 대신하여, 양서순무사중군(兩西巡撫使中軍)으로 군기를 쇄신한 뒤 정주성을 폭파시켜 난을 평정하였다.

1812년 다시 우포도대장이 되었고, 이 해 6월 난의 평정에 따른 상벌을 논의하는 중 항복한 반군 1,917명을 모두 처형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공과상반(功過相半)이라는 것으로 대간에서 삭직을 요청하였다. 다음해 좌포도대장을 지내고 죽었다. 1834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서정일기(西征日記)』
집필자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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