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명익(鳴益). 찬성사 윤계종(尹繼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진(尹鎭)이다. 아버지는 윤시중(尹時中)이며, 어머니는 이연춘(李延春)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생진과에 합격하고, 1601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승정원주서를 제수받았다. 1603년 감찰로 전직되었으며,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3년 예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에 올라 희천군수 최동망(崔東望)을 탄핵하는 등 언론 활동을 전개했고, 이어 사서(司書)가 되었다.
다시 정언이 되었다가 예조좌랑·병조좌랑을 거쳐 병조정랑으로 승진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탄 왕조실록을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으로 재간할 때 춘추관기주관을 겸해 참여하였다. 그 뒤 전라도도사를 역임했으며, 광해군이 즉위하자 헌납으로 발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서흥부사로서 관내 축성에 공이 커 가자(加資)되었다.
1612년 임진왜란으로 문란해진 양전절목(量田節目)을 바로잡기 위해 경상도양전사(慶尙道量田使)에 임명되었으며, 경상도가 지역이 넓고 임무가 중해 양전사를 좌·우도로 나누어 찰리사(察理使)로 개칭할 때 좌도를 담당해 치적을 올렸다. 그 동안 일시적으로 순천부사를 겸임했으나 사간원의 상소로 관직이 바뀌게 되었다.
1614년 동래부사로 재직 중 대마도주 소[宗義智]가 사절과 서계(書契)를 보내어 울릉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자, 이를 반박해 조선의 영유권을 명확히 하였다. 1617년 서북 지역에 조도사(調度使)로 파견되어 철(鐵)의 공급을 원활히 했으므로, 영건도감(營建都監)의 보고를 받자 가자되었다.
1622년 명나라와 후금이 대립해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들어왔을 때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군이 출병하자 분호조참판으로서 군량 운반을 맡았다.
인조반정 뒤 분호조참판으로 재직 중 베와 곡식, 은화(銀貨) 등을 횡령해 삭직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그 사실을 알고도 관에 알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