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유일(幼一), 호는 창주(滄洲). 좌의정 윤개(尹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비(尹棐)이다. 아버지는 도승지 윤담무(尹覃茂)이며, 어머니는 전주 유씨(全州柳氏)로 부사 유연(柳埏)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5년 서원현감(西原縣監)이 되었으나 정사를 게을리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617년 병조의 좌랑·정랑을 거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세자시강원 겸필선을 거쳐 홍문관의 수찬(修撰)·부교리를 역임했으며, 다시 필선·보덕·수찬에 번갈아 보임되었고, 이어 의정부 검상·사인을 지냈다.
청요직을 지낼 무렵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정형복(鄭亨復)으로 하여금 폐모론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리게 하고, 폐모론에 반대한 정홍익(鄭弘翼)이 유배당하자 도성 문밖까지 전송하는 등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였다.
1623년 겸보덕으로 궐내에 입직하던 중 인조반정이 일어나 반정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될 뻔했으나 이귀(李貴)의 만류로 화를 면하고, 반정에 호응해 전한이 되었다. 이어 부응교·응교·집의·사간·사인을 역임하고 1627년(인조 5) 보덕으로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이 때 대부분의 조신들이 인조의 피란을 주장했으나, 윤지경은 500명의 군졸만 있으면 임진강을 막을 수 있다는 기개를 보여 검독어사(檢督御史)로 임진강에 파견되어, 적을 막으려고 전비를 갖추는 도중 강화가 성립되어 적이 물러갔다.
그 뒤 인조는 교서를 내려 윤지경의 활약을 칭찬했고 그 공으로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우부승지를 거쳐 1630년 예조참의로 전직되어, 재이(灾異)에 대해 구언(求言)할 것을 건의하였다. 1632년 관찰사 재직시 방정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청나라와의 척화를 강력히 주장해 윤황(尹煌)·윤형지(尹衡志)와 함께 삼윤(三尹)으로 당시 사람들로부터 높이 칭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