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연(子淵). 판서 이계남(李季男)의 후손이며, 이창환(李昌煥)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배(李培)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명석(李命錫)이며, 어머니는 조창구(曹昌久)의 딸이다.
1715년(숙종 4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다. 그 뒤 장령·헌납·집의를 거쳐, 승지에 이르렀다.
1756년(영조 32) 경성부사로 재임 중 힘을 다하여 기민(飢民: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한 결과, 돌아올 때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해진 침구뿐이었다 한다.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에게 진력하여 처자를 제대로 돌보지 않을 정도로 청백하였다.
당시 정승인 김재로(金在魯)는 “그를 등용하지 않으면 어찌 다른 인물을 쓰겠는가.”라고 반문하였으며, 여러 중신들도 한결같이 이광보의 인물됨을 칭찬하였다. 그 뒤 숭록대부 지중추부사가 되어 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