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형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공릉참봉, 건원릉참봉, 함열현감 등을 역임하였으며, 높은 벼슬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빈번히 소를 올려 당시의 공론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학자.
이칭
자하(子夏)
삼우재(三友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28년(인조 6)
사망 연도
1708년(숙종 34)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김포
주요 관직
공릉참봉|건원릉참봉|함열현감
관련 사건
갑술옥사|
정의
조선 후기에, 공릉참봉, 건원릉참봉, 함열현감 등을 역임하였으며, 높은 벼슬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빈번히 소를 올려 당시의 공론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학자.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하(子夏), 호는 삼우재(三友齋). 김포 출신. 효령대군(孝寧大君)의 8대손 명원군 이호(明原君 李灝)의 5대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향리인 김포에 은거하며 과거에 응하지 않았으나,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학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675년(숙종 1) 송시열이 유배당하자 유학(幼學)으로 조정의 대신들을 비난하는 소를 올린 바 있으며, 이로 인하여 부령으로 정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허적(許積)의 상계로 정배명령이 환수되고, 단지 유벌(儒罰)을 받고 향리로 방환(放還)되었다.

1683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릉참봉이 되었으며, 재임 중 능침(陵寢)의 제례에 육선(肉膳)을 쓰지 않은 채 소찬으로만 제사하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는 소를 올렸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여 스승인 송시열이 사사되자, 유생들을 이끌고 돈화문 밖에서 소(訴)를 안고 울며 항변하다 고성(固城)으로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자 풀려나 공릉참봉이 되었으며, 건원릉참봉·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를 거쳐 함열현감으로 나갔는데, 여기서 치적이 가장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아 가자(加資)와 아울러 말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701년 장악원주부를 역임한 뒤, 다시 외직으로 나가 연풍현감이 되어 6년간 재임하던 중 죽었다. 이만형은 현직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빈번히 소를 올려 당시의 공론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약파만록(藥坡漫錄)』
집필자
이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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