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얼(庶孽) 출신으로 음직(蔭職)을 받아 관직에 나아갔다. 1616년(광해군 8)에 월곶첨사(月串僉使)로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자 궁중에 빌붙어서 중진(重鎭: 병권을 가지고 요충지를 지키는 인물)에 제수되었다고 비난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사위 기익헌(奇益獻) 또한 서얼 출신으로서 고원군수(高原郡守)가 되었는데, 이 또한 궁중의 결탁에 의한 것이라 하여 논란이 되었다.
1620년(광해군 12)에 덕천(德川)·영암(靈巖)의 군수가 되었는데, 이 때 해유(解由: 임기가 만료된 관리가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그 책임을 면하는 일)를 받지 않은 것이 논란이 되었으며, 영암군수 재임시 전세(田稅) 및 별수미(別收米)·작미(作米)의 미수된 수량이 4,000여 석에 이르러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22년에 영월군수(寧越郡守), 1623년에 고원군수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