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빈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월곶첨사, 안주목사, 고원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623년(인조 1)
주요 관직
월곶첨사(月串僉使)|안주목사|고원군수
목차
정의
조선 후기에, 월곶첨사, 안주목사, 고원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생애 및 활동사항

서얼(庶孽) 출신으로 음직(蔭職)을 받아 관직에 나아갔다. 1616년(광해군 8)에 월곶첨사(月串僉使)로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자 궁중에 빌붙어서 중진(重鎭: 병권을 가지고 요충지를 지키는 인물)에 제수되었다고 비난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사위 기익헌(奇益獻) 또한 서얼 출신으로서 고원군수(高原郡守)가 되었는데, 이 또한 궁중의 결탁에 의한 것이라 하여 논란이 되었다.

1620년(광해군 12)에 덕천(德川)·영암(靈巖)의 군수가 되었는데, 이 때 해유(解由: 임기가 만료된 관리가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그 책임을 면하는 일)를 받지 않은 것이 논란이 되었으며, 영암군수 재임시 전세(田稅) 및 별수미(別收米)·작미(作米)의 미수된 수량이 4,000여 석에 이르러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22년에 영월군수(寧越郡守), 1623년에 고원군수를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집필자
장필기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