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정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한성판윤, 예조판서, 함경감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이중(頤仲)
이암(彛菴)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42년(영조 18)
사망 연도
1804년(순조 4)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정언|지평|수찬|홍충감사|대사헌|공조판서|한성판윤|에조판서|함경감사
정의
조선 후기에, 한성판윤, 예조판서, 함경감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이중(頤仲). 호는 이암(彛菴). 형조판서 이언강(李彦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태제(李泰濟)이다. 아버지는 판서 이창수(李昌壽)이며, 어머니는 유담(柳紞)의 딸이다. 판부사 이창의(李昌誼)의 조카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66년(영조 4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설서(說書)가 되었다. 이 때 아버지가 조태억(趙泰億)이 쓴 『선원보략(璿源譜略)』 발문(拔文)을 없애도록 청하다가 탄핵당했는데 이 일로 무합당하자, 이에 자신의 직을 교체해 줄 것을 상소하나 오히려 영조에게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1768(영조44)에 정언이 되었고, 이어 지평·부수찬·겸사서·수찬을 거쳤다. 이듬해 검토관으로 소학제사(小學題辭)의 강(講)에 참석하여 성인(聖人)의 지기(志氣)는 말할 성쇠가 없지만, 제왕(帝王)의 치법(治法)은 초년과 만년이 같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직간(直諫)하는 문을 활짝 열어 놓아 이를 경계해야 한다고 직언하기도 하였다.

이병정의 이 같은 성격으로 이득신(李得臣)을 구원하는 차자(箚子: 임금에게 간단한 서식으로 올리는 글)를 올렸다가, 방자하다 하여 시종안(侍從案)에서 이름이 삭제당하기도 하였다. 이어 헌납·교리 등을 역임했는데, 이 때 글을 사서 과거를 절취했다며 권진(權禛)을 논핵하였다.

뒤에 권진과 함께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에 의망(擬望: 후보자로 추천됨)되었는데, 영조는 이는 전장(戰場)을 야기시키는것이라 하고 경계하였다.

그 뒤 반대 당파로부터 많은 탄핵을 받기도 했으며, 1779년(정조 3) 홍충감사(洪忠監司: 충청도관찰사)로 파견된 뒤 재상증열미(災傷拯劣米)의 기한을 물리치게 청하는 등 민치(民治)에 힘썼으나, 사사로이 공곡(公穀)과 공금을 전용했다 하여 탄핵되기도 하였다.

또한 1780년(정조 4)에는 홍국영(洪國榮)의 숙부 홍낙순(洪樂純)을 탄핵했는데, 도리어 홍국영의 여당으로 지목되어져 탄핵되었다. 1789년(정조 13)에는 대사성으로서 태학(太學)의 동·서재가 각각의 색목(色目)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폐단을 들추기도 하였다.

대사헌·동지경연사·공조판서·개성유수·수어사·한성판윤·여주목사·지돈녕부사·예조판서·함경감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804년(순조 4)에 상호군(上護軍)으로 졸하였다. 『순조실록(純組實錄)』에는 빼어난 재주가 있고 문사가 넉넉하며 민첩하나, 세력과 이(利)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장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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