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항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대사헌, 병조참판, 함경감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숙겸(叔謙)
삼신재(三愼齎)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85년(숙종 11)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여주(驪州)
주요 관직
충청감사|대사간|호조참판|전라도관찰사|대사헌|병조참판|함경감사
정의
조선 후기에, 대사헌, 병조참판, 함경감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숙겸(叔謙). 호는 삼신재(三愼齎). 초명은 이수익(李壽益)이다. 이심(李審)의 10세손이며, 이훤(李烜)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동일(李東一)이고, 아버지는 이제(李𪗆)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23년(경종 3) 참봉(參奉)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727년(영조 3)에 사과(司果)로서 문과중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29년에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있으면서 변방 수비를 잘 했다 하여 특별히 말 1필이 하사되고 가자(加資: 당상관 이상의 관직에 오름)되었다.

승지·대사간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장세(場稅) 징수문제로 추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또 관내 고을을 순행(巡行)하다가 그 고을의 수령이 치적이 있다고 여겨 그 공형(公兄: 三公兄의 준말로 지방의 戶長·吏房·首形吏의 세 관속을 일컫는 말)을 불러 술을 권하며 치하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체통을 잃었다 하여 논핵되기도 하였다. 군작미(軍作米)를 내어 기민(飢民)을 구제하는 등 치적에도 힘썼다.

이어 충청감사를 거쳐 1736년(영조 12)에 대사간이 되었다. 이 때 기유처분(己酉處分)된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시호(諡號) 회복 문제가 대두되자 이를 신하들이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다가 파직되었다. 이어 진위부사(陳尉副使)·호조참판·도승지·사직 등을 거쳐 다시 1738년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죽은 아들의 아내가 가속을 뒤따라 왔으므로 3일 안에 돌아가도록 꾸짖고는 이 일로 인혐(引嫌: 자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침)하여 사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나 시정의 공폐(貢弊)·시폐(市弊) 문제가 비등한대도 이를 잘 살펴 다스리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대간으로서 풍기(風氣)가 있다 하였다.

1742년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使)를 역임하였다. 그 뒤 병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 도승지 등을 거쳐 1744년에 함경감사가 되었다. 이 때 관내의 덕원(德源)과 원산(元山)에서 기로소(耆老所)의 절수(折受: 양안에 없거나 버려진 땅을 신고한 자가 경작하고, 경작자에게 세금을 부담하던 일)를 부담지우자, 변방의 특수성과 전에 없던 예라고 하여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 밖에 삼수(三水)·갑산(甲山)이 재해를 입자, 전세미태(田稅米太: 전세로 내는 쌀과 콩)와 삼색노비(三色奴婢: 세 노비 가운데 한 사람만 공역을 지고 두 사람은 면제받는 조건으로 베나 무명 등을 바침)의 신공(身貢)을 연기해 주도록 의논하는 등 그 직무에 충실하였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장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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