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남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전기 효행으로 소격서 참봉에 제수된 문신.
이칭
단례(端禮)
영응선생(永膺先生)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29년(중종 24)
사망 연도
1577년(선조 10)
본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
관련 사건
병자호란
정의
조선전기 효행으로 소격서 참봉에 제수된 문신.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단례(端禮), 호는 영응선생(永膺先生). 병절교위(秉節校尉) 이필(李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봉 이계장(李繼長)이고, 아버지는 사헌부장령 이언침(李彦忱)이며, 어머니는 홍문관박사 안한영(安漢英)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스스로 힘써 행할 줄 알았으므로 효성 있는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직언으로 탄핵을 받고 순창군수로 좌천된 아버지를 따라가 그 곳에서 김인후(金麟厚)의 제자가 되었다.

김인후가 자(字)와 자설까지 지어주었으며, 이 때 이중호(李仲虎)에게도 배웠다. 뒤에 아버지가 서천으로 귀양가 죽자 지성으로 장사지내고 3년간 여막살이를 해 나이 20도 못되어 지효(至孝)라는 이름이 널리 퍼졌다.

1572년(선조 5) 학행이 있는 선비를 천거할 때 소격서(昭格署)의 참봉에 제수되었다. 1577년(선조 10)에 어머니 안씨가 이질(痢疾)을 앓아서 증세가 위급하자 목욕하고 울부짖으며 하늘에 호소했다 한다.

어머니는 차츰 회복되었으나 그는 오랫동안 시탕(侍湯: 약을 써서 병환을 시중함)과 간호에 지쳐서 피를 토하다가 그 해 8월에 죽으니 사람들이 연안의 읍호(邑號)를 따라 ‘영응선생’이라 하였다.

이기직(李基稷)·이기설(李基卨) 두 아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쌍벽(雙壁)·연주(聯珠)라고 일컬었다. 맏아들 이기직은 아버지의 상사에 지나치게 슬퍼해 23세에 죽고, 시집 안 간 누이도 애통해하다가 18세에 죽으니 향교구동(鄕校舊洞)에 사는 사람들이 지극한 효성을 조정에 알려, 인조의 특명으로 효자문과 정려가 세워졌다.

따라서 어머니 안씨와 부인 정씨, 아들 이기직·이기설, 딸 모두 그와 더불어 표창을 받아 한 집에 여섯 정문이 세워졌으며, 임금이 효자삼세(孝子三世)라는 편액을 내렸다. 그 뒤 또 이기설의 아들 이돈오(李惇五)·이돈서(李惇敍) 및 이돈오의 처 김씨가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해 모두 정려되어, 여덟 개의 정문이라는 뜻에서 팔홍문(八紅門)이라 일컬었다.

참고문헌

『구암유고(久菴遺稿)』
『어우집(於于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명신록(名臣錄)』
『명현록(名賢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집필자
이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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