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릉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조선 제8대 국왕 예종과 안순왕후 청주한씨의 능.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조선 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예종|안순왕후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475-92번지
내용 요약

창릉(昌陵)은 조선 제8대 국왕 예종과 안순왕후 청주한씨의 능이다. 예종릉은 서쪽 언덕, 안순왕후릉은 동쪽 언덕에 조성된 동원이강형(同原異岡形)이다. 예종의 형인 덕종 경릉과 같은 고양 서오릉 내에 조성되어 있으며, 경릉과 왕릉 배치가 서로 반대이다.

정의
조선 제8대 국왕 예종과 안순왕후 청주한씨의 능.
건립경위

1469년 11월 28일 예종(睿宗, 1450~1469, 재위 1468~1469)이 승하하자 의경세자(懿敬世子, 1438~1457, 추존왕 덕종) 묘소인 경릉(敬陵) 북쪽에 산릉의 자리를 정하였다.

예종 창릉(昌陵)에 부역한 역군(役軍)은 7천 명에 이르렀는데,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광릉(光陵) 조영,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 영릉(英陵) 천릉 등이 창릉 조영 이전에 연달아 있어서 매우 어려운 환경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470년 2월 5일에 예종을 창릉에 안장하였다. 안순왕후(安順王后, ?~1498)는 1498년 12월 23일에 승하하였으며, 1499년 2월 14일 창릉에 장사를 지냈다.

1754년에 건립된 창릉 표석 주1에는 예종릉을 ‘경릉 북강 간좌지원(敬陵 北岡 艮坐之原)’, 안순왕후릉을 ‘대왕릉좌강간좌지원(大王陵左岡艮坐之原)’이라고 하여 예종릉이 서쪽, 왕후릉이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변천

고양현(高陽縣)은 창릉과 경릉이 안치된 땅이라고 하여 1470년 군(郡)으로 승급되기도 하였다. 창릉은 조선시대 내내 관리되었으며, 1754년 표석을 건립하였다. 1756년 4월 26일 창릉에 화재가 발생해 주2이 사라져 없어지자, 6월 2일에 정자각을 다시 지었다.

형태와 특징

예종릉과 안순왕후릉의 돌거리 배치는 같다. 전체가 상중하계(上中下階) 3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계에 난간을 두른 봉분과 주3, 주4, 주5, 주6주7이 건립되어 있다. 중계에는 장명등(長明燈)과 주8, 주9, 하계에는 주10과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

정자각은 두 능의 남쪽 중앙에 있으며 비각(碑刻)과 주11이 남아 있다. 『창릉지(昌陵誌)』에는 정자각 남쪽 좌우에 수복방(守僕房)과 주12이 그려져 있어서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금석문

비각에는 1754년 건립된 창릉 표석이 있다. 이 표석은 정종(定宗, 1357~1419, 재위 1398~1400) 후릉(厚陵), 덕종 경릉, 문종(文宗, 1414~1452, 재위 1450~1452) 현릉(顯陵), 세조 광릉,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1494) 선릉(宣陵),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 정릉(靖陵) 표석과 함께 제작되었다. 이때 건립된 표석들은 앞면의 전서(篆書)는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이 쓰고, 뒷면의 음기는 홍계희(洪啓禧, 1703~1771)가 썼다.

의의 및 평가

창릉은 예종의 형인 덕종 경릉과 같은 고양(高陽) 서오릉(西五陵) 내에 조성되어 있으며, 경릉과 왕릉 배치가 서로 반대이다.

최근 논문에서 예종릉과 안순왕후릉의 위치가 바뀌었으며, 조선왕릉 조성 시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을 따랐으나, 덕종 경릉,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 명릉(明陵)처럼 서로 다른 언덕에 조성할 경우 문제삼지 않았다고 추정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창릉지(昌陵誌)』
『춘관통고(春官通考)』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Ⅰ』(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논문

김이순, 「창릉의 왕과 왕후 능의 위치 재고」(『미술사학연구』 제267호, 한국미술사학회, 2010.9)
주석
주1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    우리말샘

주2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3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4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5

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우리말샘

주6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7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8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9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    우리말샘

주10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11

능(陵), 원(園), 묘(廟), 대궐,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세워서 죽 박는다.    우리말샘

주12

임금의 진지를 짓던 주방.    우리말샘

집필자
김민규(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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