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치준 ()

고대사
인물
백제 유민의 후예로 당나라에서 우표도위익부좌랑장상주국, 우금오위수익부중랑장상주국 등을 역임한 관리. 장군.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676년
사망 연도
706년 5월
주요 관직
행난주광무진장상주국|우표도위익부좌랑장상주국|우금오위수익부중랑장상주국
관련 사건
이진충의 난
정의
백제 유민의 후예로 당나라에서 우표도위익부좌랑장상주국, 우금오위수익부중랑장상주국 등을 역임한 관리. 장군.
개설

백제 왕족 부여씨(扶餘氏)에서 분파된 흑치씨(黑齒氏) 가문 출신이다. 증조부는 현덕(顯德 : 혹은 加亥), 조부는 사차(沙次 : 혹은 沙子)이며, 백제 멸망기의 장군으로 당나라에서 크게 활약한 흑치상지(黑齒常之)의 아들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무장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무략(武略)을 품었으며, 정기(旌旗)를 벌이거나 군진(軍陣)을 그리며 노는 등 무장으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696년 약관(弱冠)의 나이로 양왕(梁王)이삼사(李三思)를 따라 이진충(李盡忠)의 난을 토벌하는 데 출전해 군공을 세웠다. 그래서 유격장군 행난주광무진장상주국(游擊將軍行蘭州廣武鎭將上柱國)을 제수받았다. 698년 선고(先考) 흑치상지의 무고함이 밝혀져 신원(伸寃)이 이루어져 추증을 받게 됨과 더불어 지금까지의 공로가 고려되어 우표도위익부좌랑장상주국(右豹韜衛翊府左郞將上柱國)에 임명되었다.

699년 당 고종에게 청해 아버지 흑치상지의 무덤을 뤄양(洛陽)의 망산(邙山)으로 이장해 그 혼령을 모셨다. 얼마 뒤에는 우금오위수익부중랑장상주국(右金吾衛守翊府中郞將上柱國)으로 옮겼다. 이후 평탄한 관료생활을 누리다가 706년 5월 31세를 일기로 뤄양현 사제(私第)에서 병으로 졸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아버지 흑치상지의 무덤 곁에 묻혔다.

1929년 뤄양 망산에서 그의 묘지명이 출토되었다. 그것이 1980년대에 세상에 알려지면서 비로소 그의 일생이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역주한국고대금석문(譯註韓國古代金石文)』(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曲石精廬藏唐墓誌』(李希泌 편, 齊魯書社, 1986)
「백제(百濟) 흑치상지(黑齒常之) 부자(父子) 묘지명(墓誌銘)의 검토(檢討)」(이문기, 『한국학보』 64, 1991)
집필자
이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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