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희 ()

장선희
장선희
공예
인물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핵심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예림원 초대 과장 및 교수를 역임한 공예가 · 교육자 ·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단예(丹藝)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893년(고종 30) 2월 19일
사망 연도
1970년 8월 28일
본관
결성
출생지
평양 박구리
관련 사건
대한애국부인회 사건
내용 요약

장선희는 해방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학과 초대 과장 및 교수를 역임한 교육자이다. 1893년에 태어나 1970년에 사망했다. 1919년 황애시덕 등과 함께 비밀여성독립운동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활동했다. 회원의 밀고로 옥고를 치렀는데 감옥에서 여자 죄수들에게 자수를 가르쳤다. 출옥 후 일본에서 자수와 그림을 공부했다. 한국전쟁 이후 장선희는 자수에서 조화로 전환하였다. 4만여 점의 조화를 뉴욕세계박람회에 출품하기도 하고 조화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조화가 전문적 예술 활동이며 주부의 부업에 좋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키워드
정의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핵심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예림원 초대 과장 및 교수를 역임한 공예가 · 교육자 ·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1893년 2월 19일 평양 박구리에서 아버지 장준강(張俊綱)과 어머니 이영숙의 2녀로 태어났다. 1905년 안악 안신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장선희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 언니와 함께 자수 소품을 팔아 그 이익금으로 의연금을 낼 정도였다. 안신소학교를 졸업한 1908년부터 3년간 모교인 안신소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교사로 근무하며 받은 월급과 틈틈이 수예품을 제작해 판매한 돈을 모아 둘째 오빠 장인석(張仁錫)의 학비(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입학)를 보태기도 하였다. 자신도 자수 제품을 팔아 학비를 모아서 1911년 평양 숭의여학교에 진학하였고, 1912년 봄 오빠의 권유로 서울 정신여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1914년 3월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특기인 자수를 더 연마하고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 3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자수와 편물 및 조화 만드는 실력을 쌓았다. 1915년 경성여고보를 졸업한 후 정신여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김마리아, 황애시덕, 신의경과 함께 비밀여성독립운동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핵심 간부로 활동하면서 지방지회를 조직하고 황해도 재령의 만세사건을 준비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회원의 밀고를 받아 일제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부터 1922년 5월까지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옥고를 치르는 동안 감옥 안에서 자수공부방을 만들어 여자 죄수 15명을 모아 자수를 가르쳤다.

출옥 후 황해도 재령 친정집에서 요양하다가, 미국인 선교사 맥큔(George Shannon McCune, 한국명 윤산온)과 남매이자 역시 선교사였던 캐서린(Catharine A. McCune, 한국명 윤가태)과 기안나가 유학 비용을 대 주어 1922년 12월 도쿄여자미술학교[東京女子美術學校] 자수과 1학년에 입학하였다. 불과 1달만에 교수들에게 자수 실력을 인정받아 이듬해 특별시험으로 졸업반에 편입하여 자수과를 졸업하였다. 이어 1923년 같은 학교 동양학과 3학년에 편입하여 자수를 위한 그림 공부를 한 후 1924년 3월에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1924년부터 1927년 7월까지 정신여학교 교사로 근무하였고 1927년 1월부터 7월까지는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를 겸임하였다. 1929년에는 이화여고보 교사로 근무하였다. 한편 1926년 3월에 일본 유학을 함께 한 대구의 오학수(吳鶴洙) 목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4녀 1남을 두었다.

여성들이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전문기술을 가르치고자 노력하여 1927년 8월에는 경성여자기예학원을, 1932년에는 조선여자기예원을 설립하였다. 이곳에서는 자수, 조화, 도화, 면사포 제조법을 가르쳤다. 자수는 전통자수 뿐 아니라 일본 등의 동양자수, 프랑스 자수, 문화 자수, 털실 자수 등을 가르쳤고, 조화는 아기자기한 꽃 장식이나 귤꽃을 단 최신 스타일의 신부 면사포 화관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학비는 무료였으며 불우한 환경의 여인들이 주로 찾아와 배웠다.

당시 조선 13도에 무궁화꽃이 만발한 모양을 도안한 「근역3천리」를 개발하였으며, 이것은 함흥, 재령, 진주 등지의 기독교학교의 자수도안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렇게 자수로 번 돈을 은밀히 상해임시정부에 보내거나 계몽운동 자금으로 내놓기도 하였다. 1938년 제17회 조선미술전람회 제3부 공예부에 자수 작품 「용」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해방 이후 이화여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장선희는 1945년 9월부터 예림원(미술대학 전신)의 자수 전공을 개설하여 교수 겸 초대 과장을 역임하였다. 김은호에게 그림 지도와 동양자수의 색 배합에 관한 조언을 받았다. 이후 사실적인 표현의 동양화를 자수로 옮겨 순수미술의 분야로 확립시켰다. 특히 화조를 스케치하여 작품의 밑그림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단모자수’라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하여 작품의 사실적 표현을 배가시켰다. 1950년까지 제자를 양성하였고 한국 자수의 보급과 여성의 기예교육에 공헌하였다. 아울러 대한민국 국기나 대통령기 및 유엔기를 자수로 제작하였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으로 약칭) 공예부가 설치되면서 그녀는 국전 제1회부터 제20회까지 공예부 추천작가로 관여하였고 심사위원도 2번 맡았다. 하지만 당시 국전에서 자수는 예술적 수준을 인정 받지 못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다.

6.25 이후 장선희는 자수에서 조화로 전환하였다. 부산에 피난 가 있는 동안 300여 종의 조화를 개발하였고, 1955년 대한여자기예원을, 1956년 장선희조화연구소를, 1959년 대한여자미술학원을 설립하였다. 조화를 활용한 공예품의 상품화에 주목한 것이다. 1963년 2월 제1회 장선희조화전시회를 중앙공보관에서 개최하였다. 재료는 포플린, 인조견, 비단, 비로드(veludo) 등의 천에 염색하거나 붓으로 그려 매화, 모란, 수국 등의 다양한 조화를 제작했다. 1963년까지 500~600여 종류의 조화를 제작하여 “생화가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각종 강습회를 통해 부녀자나 직업여성의 부업을 장려하는 데 기여하였다. 조화 개발과 보급의 성과를 토대로 1965년 4만여 점의 조화를 뉴욕세계박람회에 출품하였다. 1966년 장식용 조화 500여 점으로 제2회 장선희조화전시회를 열어, 조화가 미를 창조하는 전문적 예술활동일 뿐 아니라 주부의 취미나 부업에 좋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1970년 8월 28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인정 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002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만년꽃동산 : 장선희여사 일대기』(인물연구소, 1985)
「장선희의 삶과 활동 : 독립운동 및 기예교육」(김성은, 『이화사학연구』47,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사학연구소, 2013)
「근대기 한국 ‘자수’미술 개념의 변천」(김철효, 『한국근대미술사학』12,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
「바느질꽃 할머니 장선희」(이덕주, 『인물로 본 한국 기독교여성 100년』22, 1985)
「회상기 : 자수세계를 순수미술로 확립시킨 은사」(엄정윤, 『만년꽃동산』, 1985)
「꽃 속에 묻혀 산 일생 고 장선희여사 조화, 자수에 40년 바쳐」(『동아일보』, 197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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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장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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