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우선 문헌상으로 보이는 조선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조선에 대해 언급한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기록은 『전국책』 연책(燕策)과 『사기』 소진전이다.
즉 연나라 문후(서기전 361∼서기전 333)에게 소진이 당시 연의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연의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으며.”라고 했다. 이를 통해 서기전 4세기 중반에는 조선이 연의 변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요 세력으로 당시 북중국 지역의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위략(魏略)』의 조선에 대한 기사와 통한다. 또한 『위략』에서는 조선이 연과 각축을 벌이다가, 연의 소왕(昭王: 서기전 331∼279) 때에 진개(秦開)의 침공으로 서쪽 영토 ‘2,000리’를 상실했다고 하였다.
이에서 ‘2000리’는 논란을 안고 있는 문제이지만 『사기』 조선전에서도 고조선이 연에 영토를 상실당했다고 전하므로, 고조선은 이 무렵 서쪽 영토를 상실하고 연과 청천강을 경계로 마주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청천강 서쪽의 요동 지역은, 적어도 일부는 고조선의 영역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과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의 왕검성이었다는 점을 결부시키면, 서기전 4세기 이전의 고조선은 세력을 서쪽으로 뻗쳐 요동 지역을 세력하에 포괄하고 있었으며, 연과 각축을 벌였던 상당히 강한 세력이었다는 추론이 일단 가능해진다.
그런데 서북한 지역의 대표적인 청동기 유물은 에임부분(決入部)을 지닌 세형동검이다. 이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상한은 서기전 3세기로 여기거나, 근래 이를 서기전 4세기 후반까지 올려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발생과정 및 초기 발생지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할 문제이지만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분포상의 북한계가 서기전 3세기 초 이후 고조선과 연의 요동군과의 경계였던 청천강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서북한 지역에서의 세형동검 이전 단계의 주요 금속기 유물로는 비파형동검을 들 수 있는데, 출토된 수가 매우 적고 함께 출토된 유물 또한 빈약하다.
출토된 유물에서 보이는 이 두 가지 사실은 앞에서 가정해 본 추론과 부합되지 않는다. 서북한 지역에서 출토된 빈약한 비파형동검 문화단계의 금속기 유물로는, 서기전 4세기 이전 시기에 요동 지역에 세력을 뻗쳐 연과 각축을 벌였던 정치세력의 존재를 이 지역에서 상정하기 어렵다.
비단 유물의 양적인 면 뿐만 아니라, 만약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이라면 요동 지역은 그 변방이므로, 적어도 몇몇 유물의 양식상,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인 서북한 지역의 것이 구식이고 그 영향을 받아 상대적으로 신식인 유물이 요동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런데 비파형동검 등 금속기 유물양식은 반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분포상의 북한계가 청천강이라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 동검을 특징적인 유물로 하는 금속기 문명을 영위했던 서북한 지역의 정치세력은 서기전 3세기 초 이후에 성립된 것이 된다. 평양에 중심지를 둔 고조선이 그것이다.
따라서 서기전 4세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요동 지역을 포괄했던 고조선은 중심지가 평양이 아니었던 것이 된다. 이에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일단 세형동검의 원류인 비파형동검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남만주 요령성 지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요령성 일대의 비파형동검 문화의 상한은 서기전 10세기 전후 무렵으로 여겨지는데, 이 문화는 다시 요령성 내에서 지역별로 일정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비파형동검은 양식에 따라 공병식(銎柄式), 비수식(匕首式), 단경식(短莖式)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이 가운데 공병식과 비수식은 요동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았다.
토기 양식에서도 대체로 요하선을 경계로 미송리식 토기와 변형 미송리식 토기는 요하 이동지역에서 출토되고 있고, 삼족기(三足器)는 요서지역에서는 풍부하게 출토되나 요동지역에서는 소수만 확인된다.
무덤양식에서도 고인돌[支石墓]이 요동지역에서만 보고되고 있어 참고가 된다. 문헌상으로 볼 때도 앞에서 말했듯이 요동 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다. 한편 비파형동검 문화기 때에 요서 지역에서 활약했던 족속은 산융(山戎)과 동호(東胡)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요하 이동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추정을 좀더 진전시켜 보면, 서기전 3세기 초 고조선과 연과의 첫 충돌 당시 연군의 진출선이었던 만번한(滿潘汗), 즉 오늘날의 해성현(海成縣) 서남쪽과 개현(蓋縣)을 잇는 일대 지역으로 비정해볼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요하 하류 동편에 중심지를 두었던 서기전 4세기 이전 시기의 고조선 사회의 성격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해 고조선 사회를 노예제사회로 규정하는 견해가 일각에서 견지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주요 논거의 하나로 삼고 있는 요동반도 남단 여대시(旅大市) 구역에 있는 강상묘(崗上墓)와 누상묘(樓上墓)의 성격에 대한 기본적인 해석에서조차 이견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어, 수긍하기 어렵다.
단지 심양시의 정가와자 구역에서 서기전 6∼5세기 무렵의 무덤떼가 발굴되어, 그 중 제6512호와 같이 비파형동검과 동경 등을 위시한 청동기와 가죽제품 및 구슬 등 부장품이 풍부하게 출토된 큰 무덤이 있는가 하면 같은 구역 내의 무덤 중 부장품이 거의 없는 작은 것들도 있어서, 당시 사회상의 일면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즉 사회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고, 정치적으로 우세한 집단이 성장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조선 사회의 구체적인 면모와, 정치체로서의 고조선의 성격과 구조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의 진전을 기다려보아야 한다.
한편 서기전 4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고조선은 서쪽의 연과 대립하게 되었다. 연후(燕侯)가 ‘왕’이라고 칭하며 동으로 팽창할 기세를 보이자, 고조선의 군장(君長)도 왕이라고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양국간의 대립은 고조선측이 사절을 보내 외교적 절충을 벌여 일단 해소되었다. 그러나 이어 서기전 3세기 초 연의 국세가 강성해져, 남으로 제(齊)를 공략하고, 북으로 동호(東湖)를 정벌하고, 이어 고조선에 대한 침공을 해왔다. 양국간의 전쟁에서 고조선이 패배해 영토를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 이 때 고조선은 중심부를 요동에서 평양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에 중심지를 둔 뒤, 고조선은 성능이 개선된 세형동검과 청동창 등을 만들고 철제공구와 무기도 사용해 금속기문명을 진전시켰다. 그리고 이 시기 무덤과 출토 유물은 이전 시기 이래 한반도 서북부 지역의 팽이형토기 유적에서 보이던 매장 풍속의 전통이 강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중심지 이동 후 한반도 서북부 지역의 토착주민과 공고히 결합해 나갔음을 뜻한다.
이어 진(秦)이 서기전 221년 중국을 통일하고, 이어 만리장성을 쌓으며 요동에 세력을 뻗쳐 오자,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외교적으로 복속의 뜻을 표하면서 한편으로 자체의 방어에 주력하였다. 그에 따라 고조선은 진의 요동군과 청천강을 경계로 현상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 후 서기전 3세기 말 진이 망하자 내란상태에 빠진 중국을 한이 재통일하였다. 곧이어 한 조정과 지방 제후들 간에 분쟁이 벌어졌다. 그런 와중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북중국 방면에서 동으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주로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의 이른바 ‘진고공지(秦故空地)’에 정착했고, 이 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으로 귀속되었다. 1천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해 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고조선의 준왕(準王)은 위만에게 박사의 지위를 주면서 규(圭)를 내리고 ‘진고공지’ 지역에서 거주하면서 중국으로부터의 유이민을 통괄해 국경 방면을 진수하는 직임을 부여하였다.
그런데 위만은 차츰 유이민집단을 휘하에 결속시켜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다가 서기전 194년경 한이 조선으로 침공해 오니 수도를 방어해야겠다며, 군사를 끌고 올라와 정권을 탈취하였다. 일종의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 때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탈주해 그 곳에서 자리잡아 ‘한왕(韓王)’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새로운 위씨왕조는 유이민 집단과 토착 고조선인 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대외적으로는 한(漢)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유이민 집단과 함께 전래된 일부 중국문물을 수용해 군사력을 강화해 나갔다.
한편 한반도 남부 여러 소국 및 부족들과 한의 교역을 통제하면서 중계무역의 이득을 취하였다. 이렇게 해 강화된 힘을 바탕으로 인근의 임둔·진번 등의 집단을 복속시켰고, 압록강 이북에까지 세력을 뻗치는 등 신흥국가로서의 활기찬 모습을 나타냈다.
위씨왕조의 성격에 대해, 한인(漢人)의 정복왕조 또는 식민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왔다. 한편 위만을 사정이 있어 연나라에서 살게 되었던 고조선계 사람으로 봄으로써, 위의 견해를 부정하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 문제에서 더욱 본질적인 면은 위씨왕조의 정치적 구조에 있다. 위씨왕조는 유이민과 토착민의 연합정권적인 모습을 보였다. 토착민 출신의 유력자들도 위씨왕조를 이끌어나가는 지배세력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는 낙랑군에서 ‘호한초별(胡漢稍別)’, 즉 고조선인과 한인들을 차별하는 족속별 이중구조를 보인 것과 뚜렷이 차이가 난다.
그리고 위만이 패수(이 경우 압록강임)를 건너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고 왔다는 사실은, 조선인의 입장에서 미래를 추구하겠다는 의지와 자세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집권 후 국호를 계속 조선이라 했던 것도 그러한 면을 나타낸다. 곧 위씨왕조의 성격은 이전 왕조의 계승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서기전 3세기 이래의 평양 지역의 토광묘문화의 성격이 위만조선 시기에도 이어진 것은 이와 부합하는 바이다.
한편 위씨왕조가 한창 성장해 나갈 무렵 서쪽으로부터 한 세력이 동진해 왔다. 한은 위만조선과 흉노와의 연결을 차단하고, 동북아 지역을 석권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양국간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양국간의 외교적 절충이 실패하자, 서기전 109년 한은 5만의 육군과 7,000의 수군을 동원해 수륙 양면에 걸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해 왔다.
한의 침공에 맞서 고조선인은 1년여에 걸쳐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마침내 서기전 108년 왕검성이 함락되었다. 이후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이 때 많은 수의 고조선인들이 남으로 내려갔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