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주1로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채운산(彩雲山)에 있다. 창건 주2가 자세하지 않으나 673년(무열왕 20) 혹은 720년(성덕왕 19)에 창건되었다는 설이 전한다. 그 뒤 작은 암자로서 명맥만을 유지해 오다가 임진왜란 직전에 영규(靈圭)가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전소되었다. 1624년(인조 2) 주3 극락전과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조성하였다. 숙종 대에 의승장 영규와 인연이 있는 이 절을 주4로 지정하고 임진왜란 때 활약하다 함께 전사한 영규와 의병장 조헌(趙憲)의 영정을 그려서 주5 하였다고 한다.
이후 절의 연혁에 대해 명확하게 전하는 것은 없으나 영규의 의승장 활동 이래 조선 후기 기록에서 간간이 보인다. 《여지도서(與地圖書)》나 신경준(申景濬)이 지은 《가람고(伽藍考)》에 이름이 보이다가 1799년(정조 23)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가산암(佳山庵)이라는 이름으로 주6되었다고 기록되었다. 1872년 간행된 《옥천군지도(沃川郡地圖)》에는 가산사로, 1899년 간행된 《옥천읍지》에는 가산암으로 수록되고 있다. 여러 기록을 통해 보았을 때 가산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되어 작은 암자 규모로 존재하다 폐사와 중건을 반복하며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는 법주사 산외 말사로 용암사와 더불어 옥천군의 대표적 사찰로 꼽혔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호국사찰로 이름이 났기에 1910년 총독부에서 영규와 조헌의 영정을 강탈해 갔을 뿐 아니라 불온사찰이라고 하여 탄압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34년 법당을 주7 그 내역을 기록한 〈법당중수기〉가 전해 온다. 그 뒤 1960년에 중수하였으며, 1985년 주8를 중수하고 법당 불상의 주9를 한 뒤 이듬해 미륵 입상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1992년 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하여 1624년 중건한 극락전이 전소되면서 중건 당시 조성한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과 주10 · 신중탱화도 불에 타고 말았다.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1980년 11월 13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 제77호로 지정되었으나 소실되는 바람에 1992년 10월 23일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다. 소실된 이 불상은 향나무로 만든 높이 90㎝의 불상으로, 1624년에 논산 쌍계사(雙溪寺) 북암(北庵)에서 조성하여 이 절로 옮겨온 것임이 복장기(腹藏記)에 의해서 밝혀졌다. 복장유물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1권 등 총 6점의 문헌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1477년(성종 8) 화암사(花巖寺)에서 개판한 목판본 불경으로 서지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화재 이후 1994년 현재의 극락전을 새로 지었다. 현존하는 주11로는 극락전 · 산신각(影幀閣) · 영정각(山神閣) · 주13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영정각은 지붕 주12의 명문(銘文)에 1694년(숙종 20)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면서 건축 연대가 밝혀졌다. 산신각의 부재 상태와 가구 수법이 영정각과 유사하여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이에 가산사 영정각 및 산신각은 2000년 12월 22일에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