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지』는 1899년 충청북도 옥천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편찬한 읍지이다. 읍지상송령에 따라 편찬하였다. 1책 58장의 필사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책 첫머리에 「옥천군지도」를 실었다. 1871년에 편찬된 『호서읍지』의 「옥천읍지」와 항목 구성 및 내용이 비슷한데, 호구 수치는 편찬 당시의 기준으로 수정하였다. 또한 읍사례가 빠진 부분도 다른 점이다. 19세기 말 옥천 지역의 사정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기초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옥천읍지(沃川邑誌)』는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에서 편찬하였다.
1책 58장의 필사본이다. 크기는 세로 37.6㎝, 가로 25.8㎝이다. 표제는 ‘옥천군지도읍지(沃川郡地圖邑誌)’이고, 권수제는 ‘옥천읍지(沃川邑誌)’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대한제국 출범 이후 지방행정 정보를 새롭게 확보하는 과정에서 추진된 읍지상송령(邑誌上送令)에 따라 1899년(광무 3)에 편찬하였다. 대한제국 내부는 13도 관찰부에 훈령을 내려 각 군의 읍지와 지도 2건씩을 한 달 안에 제출하게 하였다. 고종 대 당시의 급변하는 정세에 대비하고, 1896년(고종 33) 지방제도 개편 이후 지방행정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편찬 시기에 대한 단서는 관안(官案) 항목에서 찾을 수 있다. 마지막에 수록한 정도원(鄭道源)이라는 인물에 대해, 정유년(丁酉年)에 옥천군수로 부임하였다가 기해년(己亥年)에 청주군수로 갔다고 적어 놓았다. 여기에서 정유년은 1897년(광무 1)이고, 기해년은 1899년이다. 1899년에 편찬된 다른 지역의 읍지들과 유사한 형태를 지닌다.
책의 첫머리에 「옥천군지도(沃川郡地圖)」를 첨부하였다. 수록 항목은 진관(鎭管)과 사계(四界)로 시작하여 방곡(坊曲), 도로, 건치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형승(形勝), 관직(官職), 산천, 성씨(姓氏), 풍속(風俗), 토산(土産), 역정(驛亭), 제언(堤堰), 해우(廨宇), 누정(樓亭), 허시(虛市), 교원(校院), 사찰, 고적(古跡), 제영(題詠), 봉대(烽臺), 교량(橋梁), 총묘(塚墓), 명환(名宦), 관안, 명현(名賢), 충신, 효자, 열녀, 인물, 과제(科第), 생진(生進), 무과(武科), 음사(蔭仕), 호총(戶摠), 군총(軍摠), 이교(吏校), 관노비(官奴婢), 결총(結摠), 환총(還摠), 부세(賦稅), 공헌(貢獻), 봉름(俸廩) 순으로 구성하였다.
방곡 항목에는 면리 구성은 물론, 관문을 기준으로 한 각 면에 속한 동리별 위치, 편호 및 남녀별 인구수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항목 끝에 「기해장적(己亥帳籍)」에 따른 것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1899년의 통계수치를 기입한 것이다. 또한 역원과 제언, 해우, 누정, 교량 등 고을의 각종 시설과 건물의 위치 및 규모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지역 인물과 관련해 명환과 명현,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항목을 세분화하였고, 과거 합격 인물들도 문과와 무과, 음사, 생진으로 구분해 급제 시기와 관직 정보를 수록하였다. 결총 항목에 적혀 있는 한전, 수전의 결수와 군총, 환총, 부세 등이 19세기 중반에 편찬된 이전 옥천 읍지에 실린 수치와 같다.
이 읍지는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호서읍지(湖西邑誌)』 속 「옥천읍지」의 항목 구성과 내용을 대부분 따르면서, 호구 수치를 편찬 당시의 기준으로 수정하였다. 1871년의 『호서읍지』 중 「옥천읍지」와의 차이점은 읍사례(邑事例)[^1]가 빠졌다는 것이다. 1870년(고종 7)과 1894년(고종 31)의 읍지와 읍사례상송령에 따라 전국을 단위로 읍사례 제작과 파악이 이루어졌으며, 갑오개혁(甲午改革)과 이듬해의 지방제도 개혁을 계기로 읍사례류의 정리가 단절되었다.
대한제국기의 읍지상송령에 따라 옥천군에서 중앙에 보고한 읍지 내용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기본적으로 『호서읍지』 에 수록된 「옥천읍지」의 항목 구성과 내용을 따르고 있지만, 호구 등을 당시의 수치로 증보하였다. 이 읍지는 19세기 말 옥천 지역의 사정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기초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