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이곡리집터는 1976년 주민 복용섭 씨가 토기 조각 출토 내용을 전한 후, 건국대학교박물관이 1977년과 1978년 답사 과정에서 집터의 화덕자리와 토기 조각들을 채집하면서 알려진 집터 유적이다.
집터는 북한강과 합수되는 가평천 최하류에서 물길을 따라 약 9.1㎞를 거슬러 올라간 75번 국도(가화로)와 가평천 사이에 좁게 형성되어 있는 강변 충적대지상에 자리한다. 가평이곡리집터는 가평마장리유적의 집터가 발견된 곳에서 동쪽으로 1㎞ 떨어진 곳이다. 당시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이곡2리 197-2번지 박태순 씨 소유 논에 자리한다.
이곳은 과거에 미군의 주차장으로 사용되어 곳곳에서 미군의 생활폐기물이 노출되어 있었다. 현재는 모두 논으로 개간되었고, 주변의 하천 정비공사로 인해 이전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발굴 조사는 1978년 건국대학교박물관이 실시하여 유적의 층위 파악과 유물 다수를 수습하였다. 발굴 조사는 동서 방향으로 27개 시굴갱을 굴착하고 남북 방향으로 13개의 그리드를 구획하여 이루어졌다. 조사는 해발 고도가 낮은 가평천 방향의 남쪽부터 실시하였다.
가평이곡리집터는 크게 2개의 층위로 구분된다. 이를 좀 더 나누어 6개의 층위로 세분하면, 이 가운데 2층이 원삼국시대, 3층과 4층이 청동기시대 문화층이다. 우선 하층인 3층과 4층은 깊이 80∼144㎝(황갈색, 적갈색 사질토층)로서 민무늬토기 등 청동기시대 유물들이 주로 출토되었다. 상층의 2층은 50㎝(흑색 사질토층)로서 원삼국시대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최상층인 1층은 두께 30㎝로서 표토층에 해당한다.
발굴 조사에서 집터의 명확한 윤곽과 범위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면적이 15.70㎡인 원형 집터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시굴갱 조사 과정에서 집터 내부의 돌로 만든 경계와 바닥면 일부가 확인되었는데, 외줄구들로 추정하였다.
화덕자리는 집터의 남동쪽에 치우쳐 발견되었는데, 점토를 발라 시설한 것이었다. 화덕자리의 주변에서 고운 점토 덩어리들과 철재, 토기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는 점에서 조리, 토기 생산, 철기 생산 등 다양한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납작한 널돌과 냇돌 12개가 놓여 있었으며, 점토 바닥에는 7∼8㎝ 가량의 기둥구멍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불에 탄 기둥 14개가 약 20∼100㎝ 간격으로 꽂힌 채 발견되었다.
집터 내부에서는 중도식 민무늬토기, 두들긴무늬토기, 철기류, 목기류, 동물(멧돼지, 사슴) 치아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중도식 민무늬토기는 내만구연토기, 긴몸통독, 손잡이달린뚜껑, 손잡이달린독, 미니어쳐, 시루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손잡이 폭이 좁은 것과 넓은 뚜껑이 함께 공반되었다.
두들긴무늬토기는 석쇠무늬의 시루, 상단을 절제한 쇠뿔손잡이와, 꼰무늬와 석쇠무늬를 두들긴 토기 조각들이 다수 채집되었는데, 일부는 긴계란모양토기의 몸통 부분으로 추정된다. 철기는 화살촉 2점, 손칼, 철찌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철찌기는 집터 내부에서 단야(鍛冶)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목기류는 개의 여물통으로 보고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그 외 빗살무늬토기 조각 3점, 민무늬토기 28점, 각종 석기류 30점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원삼국시대 집터와는 관련이 없는 유물들이다.
가평이곡리집터에서는 아가리가 길게 외반된 중도식 민무늬토기인 긴몸통독이 다수 출토되었고, 폭이 좁은 손잡이가 달린 뚜껑류가 공반되었다. 두들긴무늬토기는 상단을 절제한 쇠뿔손잡이와, 꼰무늬와 석쇠무늬를 두들긴 토기 조각들이 다수 채집되었는데, 일부는 긴계란모양토기의 몸통 부분으로 추정된다. 또한 석쇠무늬의 시루도 증기공이 커진 형식으로 초기 단계의 두들긴무늬토기 시루와는 차이가 있다.
가평이곡리집터의 연대는 공반된 유물들이 대체로 원삼국시대 후기에서 한성백제 직전 단계에 해당하는 유물 구성을 보이는 점에서 서기 3세기 대에 해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가평이곡리집터는 인접한 가평마장리유적의 집터와 함께 초기 철기시대 내지 원삼국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표지적 유적이었다. 특히 김원룡은 가평이곡리집터와 시기적으로 같은 가평마장리유적 집터의 가속기질량분석기술(AMS) 연대관을 기초로 중부 지역 원삼국시대 초기의 유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북한강 유역에서 원삼국시대 마을 유적이 다수 발견되면서 가평마장리유적의 집터와 가평이곡리집터는 원삼국시대 초기가 아닌 원삼국시대 최말기에 해당하는 유적임이 밝혀졌다.
다만 고고학 자료가 많지 않았던 시기에 원삼국시대의 시기를 설정하고, 이를 설명하는 물질 자료 구성을 밝혀낸 것은 학술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민무늬토기와는 굳기와 제작 기법에서 차이가 있는 중도식 민무늬토기의 실체를 확인한 점에서도 이 유적의 학술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