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진사는 12세기 중엽에 성수사의 암자로 건립되었다. 조선 중기 고승 허응 보우가 대장경각을 짓고 불경을 간행하면서 독립된 사찰로 중창하였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중수(重修)되고 그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정방산 성불사의 말사(末寺)였다. 극락전을 중심 건물로 하고 주악루, 심검당, 동선당, 서승당, 향로전, 칠성각, 관음대와 칠층탑 등이 있었다.
귀진사는 『황해도 향토지(黃海道鄕土誌)』에 의하면 12세기 중엽에 성수사(星宿寺) 의 주1로 건립되었다. 조선 중기 고승 허응 보우(虛應普雨)가 대장경각을 짓고 불경을 간행하면서 독립된 사찰로 주2. 당시 간행된 경전으로는 1546년(명종 원년)에 『법화경별(法華經別)』, 1554년(명종 9년)에 주3이 있으며 1557년(명종 12년)에 『금강경(金剛經)』이 간행되었다. 특히 1563년(명종 18)에 보우의 지시에 따라 귀진사 주지가 한자 자전(字典)인 주4을 간행하였다. 그 외에도 『수륙문(水陸文)』, 주5 등 판목(板木) 2,000여장을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1563년에 『용감수경』 개판시 “귀진사 ○○전 중창(歸眞寺○○殿重創)”이라고 되어 있다. 극락전 천장에서는 1928년 『용감수경』, 『화엄사(華嚴寺)』, 『사십이장경』, 『십지론(十地論)』 등이 발견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일본인에 의해 약탈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나머지는 현재 묘향산박물관 묘향산 보현사 보존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북한 인쇄기술 발전 역사를 연구하는 데서 귀중한 자료가 되는 『용감수경』 판목은 1928년에 귀진사 극락전의 천정을 보수할 때 발견되었는데 1931년 일제가 약탈해 갔다. 남아 있던 일부 판목은 묘향산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709년(숙종 35년) 쓰여진 「귀진사사적비」에 의하면 귀진사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중수(重修)되고 그 이후 몇 자례의 보수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정방산 성불사의 주7였다. 본래 귀진사에는 극락전을 중심 건물로 하고 주악루, 심검당, 동선당, 서승당, 주6, 칠성각, 관음대와 칠층탑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귀진사는 조선 초기의 발전된 건축술이 반영되어 있으며, 당시 건축술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과거에는 칠성각, 향로전, 동선당, 서선당, 정광 여래 칠층사리탑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절이 있는 숭덕산 산정에서는 신선이 놀았다고 전해지며, 그들이 마셨다는 샘물이 있다. 도승 묵대사(默大師)와 산신령 사이에 있었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