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양동리 고분군은 서기전 1세기의 나무널무덤과 서기 2세기 이후부터 5세기 전반의 덧널무덤, 서기 4세기 후반 이후의 구덩식돌덧널무덤으로 이루어진 고분군이다. 서기전 1세기 전반부터 나무널무덤이 조영되기 시작하여 변한의 구야국부터 금관가야가 가장 발전한 서기 5세기 전반까지 지속해서 조영된 유적이다. 무덤 구조와 껴묻거리의 각 시기별 특징과 변화 모습은 낙동강 하구 물질 자료의 편년과 계통, 이 지역에서 활동한 집단의 성장 과정과 대외관계 등 변한에서 가야로의 변천 과정을 살피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김해양동고분군은 가곡마을 뒤 해발 90m의 전체 약 9만㎡ 정도의 면적에 자리하며, 구릉 전체에 서기 전후부터 5세기 전반에 이르는 고분이 분포한다.
고분군은 1992년부터 2020년까지 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 · 동의대학교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해동문화재연구원, 한화문물연구원 등에 의해 여덟 차례 조사가 이루어졌다. 여덟 차례의 발굴 조사에서 돌널무덤 2기, 나무널무덤 55기, 널무덤 10기, 덧널무덤 453기, 구덩식돌덧널무덤 41기, 독무덤 83기 등 모두 644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무덤들이 분포된 구릉의 주 능선은 북동-남서 방향으로 뻗어내려 있는데, 발굴 조사 결과 무덤들은 주 능선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면서 여러 무덤들로 심하게 겹쳐져 있고, 가장자리로 가면서 듬성듬성하다.
나무널무덤은 해발 35∼55m 사이인 구릉 아래 자리에 분포한다. 무덤 길이 방향이 등고선과 엇갈리게 주 능선 방향으로 배치되었다. 묘광 길이가 200∼300㎝, 너비 90∼130㎝, 깊이 100㎝ 정도이고, 나무널은 길이 200㎝, 너비 60㎝, 높이 30∼40㎝ 내외이다. 나무널은 상자 모양이다.
나무널무덤이 조영된 중심 시기는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전반이다. 출토 유물로는 주머니항아리 · 소뿔모양손잡이항아리 등의 토기류, 구리칼 · 쇠칼 · 쇠화살촉 · 쇠투겁창 등의 무기류, 청동고리 · 한경(漢鏡) · 방제경(倣製鏡) 등의 청동기류와 유리 또는 수정, 유리와 수정을 꿰어 만든 목걸이 등이 있다.
김해양동고분군에서 가장 많은 수가 확인된 덧널무덤은 해발 35m에서 정상부인 80m에 걸쳐 2세기 후반 이후부터 4세기 후반 또는 5세기 전반까지 만들어졌다. 덧널무덤은 길이 방향이 등고선 방향과 나란하다. 규모가 작은 것은 길이 2.5∼3.0m, 너비 2.0m에서, 큰 것은 길이 8.0m, 너비 4.0m에 이르는 등 차이가 크다.
구릉 능선 정상부 가까이에 위치한 일부 덧널무덤은 주인공을 매장한 주곽과 껴묻거리를 넣은 딸린덧널의 2개 구덩이를 나란하게 배치한 사례도 있다. 현재 영남 지역에서 가장 빠른 덧널무덤으로 알려진 162호에는 100여 점 이상의 다양한 성격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덧널무덤은 앞 시기의 나무널무덤보다 면적이 훨씬 늘어나 많은 수량의 껴묻거리가 부장(副葬)되었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출토 유물로는 굽다리접시 · 뿔잔 · 굽달린입큰항아리 · 굽달린곧은입항아리 · 무른항아리 · 화로모양토기 · 짧은목항아리 · 두귀달린짧은목항아리 · 작은그릇받침 · 토기잔 · 원통모양그릇받침 · 바리모양그릇받침 · 컵모양토기 · 원통모양토기 등의 토기, 쇠칼 · 유자이기(有刺利器) · 쇠투겁창 · 쇠화살촉 · 고리자루큰칼 · 호미 · 손칼 · 낫 · 삽날 · 따비 · 쇠도끼 · 납작쇠도끼 · 주조괭이 · 쇠스랑 · 철복 · 투구 · 갑옷 · 재갈 · 발걸이 등의 철기, 한경 · 동정 · 구리창 · 말꼴띠쇠 · 고리모양구리 기구 · 동복 · 원통모양구리 기구 등의 청동기, 유리 · 수정 · 금박구슬 등으로 만든 목걸이 · 팔찌 · 발찌 등의 장신구가 있다.
특히 이곳의 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수정 또는 수정과 유리를 꿰어 만든 목걸이는 이 시기의 가장 뛰어난 보석 세공 기술과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특히 3세기에 축조된 덧널무덤인 270호에서 출토된 수정 목걸이와 322호에서 출토된 수정제 곱구슬과 다면옥 · 마노 구슬옥 · 유리 구슬옥 등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보석으로 구성된 322호 목걸이는 2020년 10월 21일 보물로 각각 지정되었다.
구덩식돌덧널무덤은 해발 40m에서 70m 사이인 구릉 아래에서부터 정상 가까이의 사면부에 분포하며, 길이 방향이 등고선 방향과 나란하다.
돌덧널은 막돌 또는 깬돌로 적게는 4∼5단, 많게는 10단 내외로 쌓아 올렸다. 일부 돌덧널에는 길이 방향의 안쪽 벽면 가까이 바닥에 일정 간격으로 3∼4개의 기둥을 세운 구멍들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 구멍들은 돌덧널을 쌓기 전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바깥쪽에 두께가 얇은 나무판을 붙인 후 이 나무판에 돌을 기대어 쌓기 위해 설치하였다.
대부분의 돌덧널 바닥에는 냇돌을 깔았다. 뚜껑돌은 확인되지 않았는데, 나무 뚜껑이 덮인 것으로 추정된다. 구덩식돌덧널무덤에서도 많은 수량과 다양한 종류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4세기 후반의 덧널무덤 출토품의 구성과 같다.
김해양동고분군은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5세기까지 오랜 기간 형성된 김해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분묘 유적이다. 서기전 1세기 전반부터 나무널무덤이 조영되기 시작하여 변한의 구야국부터 금관가야가 가장 발전한 5세기 전반까지 지속해서 조영된 유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호화찬란한 유물과 많은 철기 유물의 부장은 양동리에 공동 묘역을 조성한 집단이 김해 대성동 고분군을 만든 집단과 함께 구야국과 금관가야의 지배 집단임을 여실히 보여 준다. 특히 여러 지역의 유물이 이곳에 집중된 현상은 국제 중개 무역항으로서의 김해 지역의 위치를 분명하게 해 주며, 당시의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