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부는 대동의병대장 전기홍, 선봉장 정원집(鄭元執), 중군장 김원범(金元範), 후군장 윤동수(尹東秀), 호군장 박영근 (朴永根), 도포장(都炮將) 이범진(李凡振), 척왜장(斥倭將) 임장택(林長澤), 도통장(都統將) 김성채(金性采), 참모장 이봉래(李鳳來), 참모 이영준(李永俊) · 김돈(金燉) · 김공삼(金公三) · 김원국(金元局) · 이성화(李聖化) 등으로 구성되었다.
의병진은 김태원 의병진의 남은 병력을 중심으로 인근에서 모병된 농민들과 포수들로 구성되었다. 최전성기인 1908년 8·9월에는 그 수가 300명을 넘었다. 기본 편제는 대장 밑에 선봉, 선봉 밑에 도포, 그 밑에 도십장(都什長) · 십장 · 병 순으로 되어 있었다.
지휘부를 종사(從士)라 했는데, 종사들은 각기 독립된 의병진을 조직해 반독립적으로 의병투쟁을 전개하면서 상호 보완하며 활동하였다. 전술은 게릴라전이었으며, 화기는 화승총 (火繩銃) 을 기본 화기로 하고, 천보총(千步銃) · 신식총을 사용하였다.
화기와 탄환은 자체에서, 또는 인근 마을 주민 중 기술자에게 의뢰해 생산하거나 일본군과 교전한 뒤 노획하였다. 그 밖에 선교사 또는 일본군 헌병대에서 통역으로 일하는 한국인들로부터 얻기도 하였다.
또, 식량 · 의복 등은 산에서 채취하거나 사냥으로 조달하기도 했지만 인근 마을주민들로부터 자진해서 제공받았고, 필요시에는 각 마을에 배정해 마을의 부호들로부터 징발하였다.
1908년 7월전라남도 영광 불갑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여러 명을 사살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대치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다수를 사살하고 5연발총 5자루, 탄환 650여발 등을 노획하였다.
이어 순창 · 장성 · 광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1909년 3월영광에서 일본군을 기습 공격해 기병 3명을 격살하였다. 영광에서 일본군 대부대에 포위되어 탈출한 뒤 같은 해 4월 때를 기다려 군세(軍勢)를 모아 다시 의병투쟁을 하기로 하고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