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1책. 목판본. 1798년(정조 22) 6대손 김한조(金漢祚)가 간행했으며, 그 뒤 1842년(헌종 8) 중간되었다. 권두에 강세륜(姜世綸) · 정신(鄭藎) · 강필효(姜必孝)의 서문과 권말에 박광석(朴光錫)의 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 · 국립중앙도서관 · 연세대학교 도서관 ·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은 소(疏) 5편, 장(狀) 1편, 서(書) 30편, 기(記) 1편, 잡저 3편, 권2는 연보, 권3은 부록으로 시 2수, 서(書) 5편, 행록(行錄) · 행장 · 묘지 · 전(傳) · 삼도유소(三道儒疏) · 용사사실척록(龍蛇事實摭錄) 등과 일본인으로서 그와 함께 귀화해 많은 공을 세우고 병자호란에 절사(節死)한 김성인(金誠仁)의 행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의 「사성명사은소(賜姓名謝恩疏)」는 선조로부터 성명을 하사받고 은혜에 감사한 상소이다. 「잉방소(仍防疏)」는 변방의 장수를 오래도록 임명해 북로(北虜)의 침입을 막자는 상소이다.
「군령장(軍令狀)」은 김응서(金應瑞)가 죄를 짓고 벌을 받게 되자, 그의 속죄를 청한 글이다. 그는 일본인으로 조선에 살게 된 것은 김응서 때문이라 말하고, 김응서가 벌을 받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자신이 왜장의 머리를 베어오면 김응서를 속죄해주고, 베어오지 못하면 자신의 머리를 베어 속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효유서(曉諭書)」는 1592년(선조 25) 4월 15일 저자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해명한 글이다. 자신은 가토(加藤淸正)의 선봉장으로 왔지만, 차마 예의지방을 침범할 수 없고, 백성을 조금도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니, 각자 직업에 안정해달라고 알린 것이다.
「강화서(講和書)」는 1592년 4월 20일 절도사에게 귀화를 청한 편지이다. 서에는 이덕형(李德馨) · 정철(鄭澈) · 이시발(李時發) · 권율(權慄) · 김성일(金誠一) · 이순신(李舜臣) · 김덕령(金德齡) 등과 주고받은 것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밖에 모하당의 가문과 가족들을 교훈한 「가훈(家訓)」, 말년에 벼슬을 떠나 향리에 살면서 향약을 실시한 「향리약조(鄕里約條)」 등이 있다. 부록의 행록 등에는 임진왜란 관계사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