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이사금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1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262~284년이다. 석씨족 첨해이사금의 뒤를 이어 김씨족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미추이사금은 즉위 후 아버지인 구도를 갈문왕으로 추봉하여 김씨족의 정치적 위상을 고양시켰고, 남당을 통해 왕권을 행사했다. 미추이사금 이후 왕위가 다시 석씨로 넘어간 것을 보면 김씨족이 석씨족을 압도할 만큼 지속적으로 권력 강화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신라사에서 실질적인 김씨 왕실의 시작으로서 내물왕 이후 김씨 왕실이 세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일명 미조(未祖: 未照) 또는 미고(未古) · 미소(未召)라고도 한다. 미추의 계보는 알지(閼智)에서부터 비롯해 알지→세한(勢漢: 熱漢)→ 아도(阿道)→ 수류(首留)→ 욱보(郁甫)→ 구도(仇道)→미추(味鄒)로 이어진다. 그러나 「문무왕릉비문(文武王陵碑文)」을 비롯한 금석문 자료에는 김씨(金氏) 왕실의 시조를 성한(星漢: 聖漢)이라 하여 이를 세한으로 보는 설과 반대의 설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미추의 아버지로 구도를 들고 있는데, 8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때 파진찬(波珍湌)에 등용되며 9대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때까지 활약하였다. 벌휴이사금 초기에 소문국(召文國) 정벌이나 백제와의 전투에서 구도의 군사적 활동이 두드러지므로 벌휴이사금 즉위에 그의 군사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도의 세력 근거지는 소백산맥 일대 중부지역으로 보고, 구도계는 경주의 석씨족(昔氏族)과 통혼함으로써 연맹을 맺으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고 이해된다.
구도는 이칠갈문왕(伊柒葛文王)의 딸인 술례부인(述禮夫人 또는 生乎) 박씨(朴氏)와 혼인했고, 딸인 옥모부인(玉帽夫人)은 벌휴이사금의 큰아들인 골정갈문왕(骨正葛文王)과 혼인하였다. 아들 미추이사금의 비(妃)는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딸인 광명부인(光明夫人)이다.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이 재위 15년에 죽자 미추이사금이 즉위하였다. 미추이사금의 즉위에 대해 『삼국사기』는 첨해이사금에게 아들이 없고, 또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나사람들이 그를 추대하였다고 기록한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첨해이사금의 선양(禪讓)을 받아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추이사금이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때 비로소 김씨족이 박씨족(朴氏族) · 석씨족보다 더 큰 세력을 점유했기 때문이다. 한편 미추가 조분이사금의 사위였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으며, 신라에서의 왕위계승은 사위나 아들이나 자격이 동등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미추이사금은 즉위 후 아버지인 구도를 갈문왕으로 추봉(追封)하여 김씨족의 정치적 위상을 고양시켰고, 남당(南堂)을 통해 왕권을 행사하였다. 특히 미추이사금대 남당정치에는 왕이 남당을 통하여 왕권을 행사하는 모습이 뚜렷이 부각된다.
백제가 봉산성(烽山城) · 괴곡성(塊谷城) 등에 쳐들어왔다는 『삼국사기』의 기사가 있는데,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미추이사금이 재위 23년에 죽자 대릉(大陵: 竹長陵이라고도 함)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미추이사금 이후 왕위가 다시 석씨로 넘어간 것을 보면 김씨족이 석씨족을 압도할 만큼 지속적으로 권력 강화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씨족의 정치적 위상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씨족은 이후 석씨왕대에도 지속적으로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제14대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14년에 “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에 쳐들어왔을 때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죽엽군(竹葉軍)이 갑자기 신라군을 도와 이들을 물리친 일이 있는데, 이들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찾아보니 대릉(죽장릉) 위에 대나무 잎이 쌓여 있어 선왕(先王)의 음덕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설화가 있다.
이 설화는 미추이사금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즉 죽엽군은 미추이사금과 연관된 군사를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며, 이들이 유례이사금의 국난(國難)을 해결해준 것은 미추로 대표되는 김씨족이 석씨왕대에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미추왕대는 신라사(新羅史)에서 실질적인 김씨 왕실의 시작으로서 내물왕(奈勿王) 이후의 김씨왕실이 세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