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 ()

고대사
개념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시기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유학하던 행위 또는 그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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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서학은 통일신라시기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선진학술과 사상을 배우고 익히던 행위이다. 서학이라는 용어는 신라 하대에 최치원이 처음 사용했으며 ‘서(西)’는 중국을 가리킨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나 송나라로 신라 하대에는 서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서학활동은 선종을 공부하려는 구법승과 골품제로 사회적 진출에 제약을 받던 6두품 출신의 도당유학생이 많았다. 신라는 서학을 통해 음양학·병법·기술학 등을 익혔다. 신라의 정치·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신라의 문화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어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분야로 성립하지는 못하였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시기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유학하던 행위 또는 그 학문.
개설

현존하는 자료에 따르면, 서학(西學)이라는 용어는 신라 하대(下代) 지식인들이 처음 사용했으며, 일연(一然)『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제목 중 하나를 ‘원광서학(圓光西學)’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인 13세기경까지도 신라시대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연원

서학에서 ‘서(西)’는 서쪽이라는 단순한 방위 개념 이상의 의미로서 곧 중국을 가리킨다. 서학의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신라 말의 유학자 최치원(崔致遠)이다. 당(唐)과 신라에서 수많은 글을 지은 최치원은 그의 저술에서 서쪽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는 당나라를 ‘서국(西國)’ 또는 ‘서토(西土)’라 하고, 당나라에서 벼슬살이한다는 말을 ‘서환(西宦)’이라 했으며, 당나라 사람을 ‘서인(西人)’이라고 표현한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최치원이 말한 서학은 신라 사람이 서쪽 당나라에 건너가 불교와 예악(禮樂) 그리고 문장을 포함한 유학(儒學)을 배우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따라서 신라와 고려시대의 지식인들이 말한 서학은 서쪽 중국으로 건너가 당 · 송의 선진학술과 사상을 배우고 익히는 행위를 의미한다.

내용

8∼9세기 당 문화의 만개와 경제적 번영, 그리고 신라인들의 당 문화 수용에 대한 욕구가 함께 어우러져 신라 하대에는 서학 풍조가 크게 유행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많은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들어가 당의 선진학술과 사상을 공부하였는데 그 중 한 부류가 구법승(求法僧)이었다.

신라에서 처음으로 서학한 사람은 진흥왕(眞興王) 대의 승려 각덕(覺德)이며, 진평왕(眞平王) 대에 원광(圓光)이 중국에 유학한 이후 서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자장(慈藏) · 의상(義湘) · 도의(道義) · 현욱(玄昱) · 무염(無染) 등 수많은 신라 승려들이 중국에 건너가 불교의 선진 이론을 체득하고 귀국해 신라 불교계를 주도했으며, 돌아오지 않은 원측(圓測) · 무상(無相) 등도 중국에서 그 명성을 떨쳤다.

구법승들의 구법활동은 하대에 가장 활발하였는데, 회창(會昌) 연간 당나라에 머물고 있던 신라 승려의 숫자만도 수 백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현재 이름이 확인되는 하대의 구법승도 모두 80여명에 이른다.

9세기 신라의 서학 구법승들은 당나라 전역을 돌아다니며 스승을 찾아 배우고 성적(聖跡)을 순례하였다. 또한 그들이 가르침을 받은 승려는 백장 회해(百丈 懷海), 마곡 보철(麻谷 寶徹), 약산 유엄(藥山 惟儼), 석상 경제(石霜 慶諸) 등 중국 선불교(禪佛敎)를 대표하던 승려들로, 신라 구법승들은 당나라 전역의 고승을 스승으로 삼아 중국의 불교 그 중에서도 선종(禪宗)을 공부하였다.

이렇듯, 서학을 통해 선종 불교의 도입과 전파가 이루어졌다. 신라 하대에는 서학 구법승들이 신라 곳곳에 자리를 잡고 선문(禪門)을 개창하였다. 나말여초(羅末麗初)에 확립된 9산선문(九山禪門)의 개창조(開倉祖)들을 살펴보면,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제외한 나머지 선문을 연 사람은 모두 서학 구법승이었다.

신라 구법승 못지 않게 도당(渡唐) 유학생들 역시 당에서 활발한 서학활동을 펼쳤다. 신라가 당에 처음으로 공식 유학생을 파견한 것은 선덕왕(善德王) 9년(640)이었다. 당나라 태종(太宗)의 유학 진흥책에 고무되어 640년(선덕왕 9)에 귀족 자제들을 당나라 국학(國學)에 처음 입학시킨 이후, 숙위학생(宿衛學生)이라는 명목으로 신라의 준재(俊才)들을 계속적으로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하대에 들어와 견당사(遣唐使)들의 빈번한 왕래를 통하여 신라의 도당 유학 풍조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희강왕(僖康王) 2년(837) 당시 당의 국학(國學)에서 공부하고 있던 신라 학생의 수가 216명에 달했다.

당의 유학생들은 국자감(國子監)에서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을 비롯해 『예서(隷書)』, 『국어(國語)』, 『설문(說文)』 등의 경전과 역사 그리고 문장을 공부하였다.

신라 하대의 김운경(金雲卿) · 최치원 같은 사람은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해 그 곳에서 관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들 도당 유학생들이 귀국해서는 당나라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을 신라 사회에 활용하기도 하고 서적을 간행하는 등 신라의 정치 ·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나라 유학과 문장을 익혀 돌아온 유학생들에 의해 유학은 정치이념과 생활윤리로서 활용되고 또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었다.

한편 신라는 불교와 유교 외에도 서학을 통해 음양학(陰陽學) · 병법(兵法) · 기술학(技術學) 등을 익혔다. 김유신(金庾信)의 후손인 김암(金巖)이 당나라에서 음양가법(陰陽家法)을 배우고 돌아와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저술하고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가르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의의와 평가

서학이 당 문화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경향을 부추김으로써 신라의 자존의식을 약화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신라 하대 서학활동에 종사한 사람들 중에는 최치원과 낭혜화상(朗慧和尙)무염 같은 6두품 출신이 다수였는데, 신라 골품체제(骨品體制) 하에서 사회적 진출에 제약을 받고 있던 6두품은 당 제국과 그 문명의 위세를 빌어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당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자국의 문화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처럼 서학은 우리나라 고대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지만, 북학(北學)이나 동학(東學)처럼 체계적인 하나의 학문 분야로 성립하지는 못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상(上)
「신라 하대 ‘서학’과 그 역사적 의미」(권덕영, 『신라문화』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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