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탈해 신화는 신라 제4대 왕이며 석씨 왕조의 시조가 된 탈해에 관한 신화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관련 기록이 있다. 남해왕 때 배 안 큰 궤짝 속에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사내아이는 자신이 용성국 사람인데 알로 태어나서 버림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후 아이는 호공의 집에 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 그것을 증거로 호공의 집을 차지하였다. 남해왕은 탈해가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여겨 그를 맏공주의 배필로 삼았다. 남해왕의 사위가 된 탈해는 뒷날 왕위에 올랐다. 이 신화는 씨족의 시조신화로 동명왕신화 등과 달리 건국신화는 아니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탈해왕조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의 탈해이사금조가 주된 자료이나, 『삼국유사』 권2의 가락국기에도 탈해왕에 관한 기록이 조금 있다. 이 신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남해왕 때에 아진포에 혁거세왕에게 해산물을 바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바다에서 까치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우짖고 있음을 보았다. 이상히 여긴 노파가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배 한 척이 있었고 배 안에 큰 궤짝이 있었다.
궤짝을 열어보니, 그 속에 단정하게 생긴 한 사내아이와 그 밖에 여러 보물, 노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내아이를 7일 동안 보살펴 주자,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기를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사람이다. 그 나라의 왕비에게서 알로 태어났으므로 버림을 받아 이곳에 닿았다.”고 하였다.
그 아이는 말을 마치자 지팡이를 끌고 두 사람의 종과 더불어 토함산에 올라가 거기다 돌무덤을 파고 7일 동안 머물렀다. 그런 뒤에 산을 내려와 성 안을 살펴 살 만한 곳을 물색하던 중 호공(瓠公)의 집에 다다랐다.
그는 호공의 집 곁에 남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서, 이튿날 아침 관가에다 그 집은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었는데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호공이 들어와 차지한 것이라고 송사를 제기하였다. 그는 숫돌과 숯을 증거물로 제시하여 그 집을 차지하게 되고 그 소문이 나자 남해왕은 이 사람(탈해)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맏공주와 배필이 되게 하였다.
이상이 이 신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석탈해가 남해왕의 사위가 된 것이 뒷날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석탈해신화」는 시조신화일 뿐 건국신화는 아니다. 이것이 「박혁거세신화」 · 「동명왕신화」, 그리고 「김수로왕신화」와 다른 점이다.
이는 왕성(王姓)이 된 한 씨족의 시조신화이다. 따라서 이 신화는 신라 육촌장신화와 더불어 씨족시조신화라는 장르를 이루고 있다. 실제로 씨족시조신화로서 「석탈해신화」는 강화봉씨 혹은 한음 봉씨의 시조인 봉우(奉祐)의 전설에까지 그 자취를 미치고 있다.
씨족시조신화로서는 신라 육촌장신화와 함께 가장 오래된 「석탈해신화」는 그 자체의 강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 출생의 원천이 물(바다)속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 신화에서 신의 신다운 출생 원천이 하늘과 물 두 곳임을 말해 주는 증거의 하나이다.
용성국 혹은 용왕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석탈해의 출생 원천이 용궁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중에 덧붙여진 표현에 불과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늘과 더불어 물 (바다)속이 신성한 초월적 세계로서 관념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동명왕신화」에 등장하는 유화(柳花), 「박혁거세신화」의 알영(閼英), 그리고 「김수로왕신화」의 왕후며 고려왕조 전설에 등장하는 작제건(作帝建)의 아내인 용녀(龍女) 등에서 줄지어 확인되고 있다.
석탈해의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경우에 있어, 남자신은 하늘이 그 출생 원천인 데 비해서 여자신 내지 그 남자신의 배우자는 물속이 출생 원천이라는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 상대 및 고대신화에 특별한 우주구성론이며 남녀론에서 매우 중요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석탈해가 남성이라는 점에서 비록 예외적이기는 하나, 물속 혹은 바닷속이 신성한 초월적인 세계라는 관념은 의연히 「석탈해신화」에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신성한 초월 세계(신들의 나라)와 세속적 지상 세계 사이에 두 가지 축이 존재하게 된다. 하나는 하늘과 땅을 잇는 수직의 축이고, 다른 하나는 물과 땅을 잇는 수평의 축이다.
수평의 축에도 물속, 물밑 등의 관념이 작용하면 수직의 축이 수평의 축에 겹쳐서 설정되는 초월적 세계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수평의 축은 그 자체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머나먼 저 너머의 세계라는 관념에 의지해서 피안의 초월적 세계를 가능하게 한다.
둘째, 석탈해가 숫돌과 숯을 몰래 묻어 남의 집을 빼앗은 궤계(詭計 : 남을 속이는 꾀)는 이 신화를 매우 특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궤계로 사술(詐術)을 통한 지능의 과시가 석탈해로 하여금 왕의 사위가 되게 하고, 나아가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는 것은 그와 같은 ‘지능겨루기’가 등극의 전제였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그 궤계를 부리기에 앞선 ‘돌무덤 속 머물기’가 상징적 죽음과 재생을 나타낼 수 있다면, 궤계에 따른 ‘지능겨루기’가 가지는 입사식적인 시련의 의미가 돋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추정은 석탈해가 왕위를 놓고 수로왕과 ‘둔갑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자료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또한, 동명왕의 아버지인 해모수가 유화와의 혼인을 허락받기 위하여 신부의 아버지와 ‘둔갑겨루기’를 하고 있음을 방증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석탈해신화」 속에는 왕위 등극의 전제가 된 두 가지 겨루기가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지능겨루기’이고 또 하나는 ‘둔갑겨루기’인데, 전자와는 달리 후자를 육체적 표현을 통한 잠재적 능력 겨루기라고 표현함으로써, 두 가지 겨루기를 대립적이면서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셋째, 앞에서 보인 요약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사후(死後)의 기록에서 「석탈해신화」는 남다른 특성을 보이고 있다. 석탈해도 박혁거세나 동명왕처럼 사후의 이적(異蹟)을 보이고 있으나, 그 이적이 나머지 신화에서는 볼 수 없는 특성을 갖추고 있다.
석탈해왕이 나타내보인 사후의 이적은, ① 그 골상이 특이하였다는 점, ② 석탈해왕 자신의 현몽과 그 지시를 따라 이른바 중장(重葬)을 치른 동시에 빻아진 시신의 뼈로 소상(塑像)이 만들어져 토함산에 모셔짐으로써, 동악신(東岳神)이 되고 대대로 나라의 제사를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뼛가루로 빚어 만든 죽은 이의 상은 시베리아 지역 샤머니즘에서 볼 수 있는 ‘온곤’에 비교될 수 있는 만큼 매우 뜻 깊은 자료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