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헌종 1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대사헌 · 공조판서 · 병조판서 · 이조판서 · 좌찬성 · 우의정 · 좌의정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좌의정이 된 뒤 1882년(고종 19) 5월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교섭에 반대하여 사직소를 올렸다. 이 소에서 군제(軍制)에 관한 일, 기예(技藝)에 관한 일, 영선사(領選使)에 관한 일 등에 대하여 여섯 가지로 조목을 나누어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 내용은 양교(洋敎) 즉 기독교의 폐해를 지적하고 일본 이외의 외국과의 조약체결을 반대하는 한편, 청국에 파견된 영선사의 철환(撤還)도 주장하였다.
또 1884년(고종 21) 갑신변복령(甲申變服令)으로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발표되자 「청환수의제변개지령소(請還收衣制變改之令疏)」를 올리고 사직하여 낙향하여 ‘재상산림(宰相山林)’이란 칭호를 얻었다.
이 소에서 송근수는 우리나라 의제의 근본과 본말은 황조의 전헌(典憲)에 있으며, 이를 토대로 고금으로 이어 내려오는 복제를 함부로 바꿀 수 없음을 역설하여 의제변개를 반대하였다.
1890년(고종 27)에는 당시의 시폐(時弊)를 논의한 상소를 올려 당시 백성들이 안고 있는 조세의 부담과 당오전(當五錢)의 폐해 등을 지적하여 조세정책을 시정하고 개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1895년 단발령이 공포됨에 ‘각식(却食)'하여 이에 항의하였으며, 1895년 9월 문석봉(文錫鳳)의 유성의병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퇴직 후에는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며, 저서로는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