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소개된 것으로는 『숙명신한첩(淑明宸翰帖)』과 『숙휘신한첩(淑徽宸翰帖)』이 있다. 전자는 효종의 제2공주 숙명공주가, 후자는 제3공주 숙휘공주가 생전에 왕과 왕비들로부터 받은 편지를 그 후손들이 모아 작첩(作帖)해서 전해 온 것이다. 전자는 1962년에, 후자는 1955년에 발굴된 까닭에, 전자가 발견되기 전에는 후자를 통칭 ‘신한첩’이라고 하였다.
『숙휘신한첩』의 원본상의 명칭은 ‘신한첩곤(宸翰帖坤)’이다. 원본은 한문편지와 한글편지를 나누어 건곤(乾坤) 2첩으로 작첩하고, 곤첩(坤帖)의 한글 서문에 ‘언서첩’이라고 명칭을 표시하였다.
당초에는 이 건첩(乾帖)이 발견되지 못하였다가, 28년이 지난 1983년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건첩에는 한문으로 쓴 서문과 효종 · 현종 · 숙종의 한문 글씨에 영조가 쓴 발문이 붙어 있으나 표지는 훼손되어 완전하지 못하다.
곤첩인 『숙휘신한첩』은 서문의 끝에 “당져 이년임슐즇츄의 외예신 진석 황공경지”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순조 2년 중추 정진석(鄭晋錫)이 작첩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정진석은 정제현(鄭齊賢: 公主夫君)의 5대손이며 영천부사를 지낸 사람이다.
내용의 편차(編次)는 부왕 효종이 2건, 모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18건, 오빠 현종이 3건, 올케 명성왕후(明聖王后)가 1건, 조카 숙종이 6건, 질부 인현왕후(仁顯王后)가 5건 등 총 35건이나, 인선왕후 편지 중 처음 2건은 인조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의 것으로 판명되고, 현종 편지 중 2건은 수신자가 공주가 아니고 자전(慈殿)인 왕후이며, 1건은 공주의 남편 인평위(寅平尉, 鄭齊賢)로 고증되었다.
맨 끝에는 인현왕후가 만든 선낭(仙囊) 한 쌍을 붙였다고 서문에 기록하였으나, 발굴 당시에는 이미 없어지고 붙인 흔적만 있었다. 숙휘공주의 인장(印章)과 인궤(印櫃)가 같이 전하고 있으며, 이 영인본인 『이조어필언간집(李朝御筆諺簡集)』에 포함되어 간행되었다.
『숙명신한첩』은 오랜 뒤 심익현(沈益顯, 靑平尉)의 후손가에 전하던 것인데, 분량은 꽤 많으나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여 뒷부분이 낙장이 되고 표지가 확실하지 못하다. 따라서, 서문 · 발문도 없고 보존경위도 분명하지 않으나, 앞에 나온 『숙휘신한첩』이 있는 까닭에 내용 파악이 용이하다.
수신자는 물론 숙명공주이며, 발신자는 계조모 장렬왕후가 2건, 부왕 효종이 9건, 모후 인선왕후가 53건, 동생 현종이 2건, 올케 명성왕후가 1건 도합 67건이다. 특기할 것은 현종의 편지에는 인주색(印朱色)이 생생한 어보(御寶) 세 개가 찍혀 있다. 위 두 간첩의 내용은 『친필언간총람(親筆諺簡總覽)』에 소개되어 있다.
이 2종의 신한첩은 효종 · 현종 · 숙종대에 친필로 씌어진 한글편지[諺簡]와 더불어 국문학사 · 국어사 · 한글서체사 연구를 위해서는 물론, 역사 · 풍속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내용이 생생한 당시의 실용어인 까닭에 구어(口語)자료로서는 절대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