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영수(英叟), 호는 소남(小楠). 해동악부체를 확립시킨 심광세(沈光世)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고부군수 심윤지(沈允之)이며, 어머니는 연안 김씨(延安金氏)다. 큰아버지 심형지(沈亨之)에게 입양되었다. 슬하에 광산 김씨(光山金氏)와 전주 이씨(全州李氏) 소생으로 2남 2녀를 두었다.
조인영(趙寅永)·조종영(趙鍾永)·서유찬(徐有贊)·이희평(李羲平)·최원도(崔元度) 등과 교유하였다. 1829년(순조 29) 음직(陰職)으로 감역(監役)이 되고 1830년(순조 30)감찰(監察)·판관(判官)이 되었으며, 1832년(순조 32)부터 1835년(헌종 1)까지 태인현감을 지냈다.
시인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근체시(近體詩)에 뛰어났다는 평을 들었다. 사상적으로 불교와 도선(道仙)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수년 동안 경기도 양주에 은거하며 도선에 침잠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작품에도 반영되어, 그의 시작품들은 대부분 당대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이은전(李嶾傳)」도 ‘이패랭이’라는 방외인(方外人)의 이야기를 입전(立傳)한 것으로 그의 도선에 대한 관심을 말해 준다. 문학 활동으로 주목되는 것은 한문 소설 「옥수기(玉樹記)」의 창작이다. 태인현감을 그만둔 뒤, 1835∼1840년 사이에 지은 이 작품은 가문소설(家門小說)에 속하는 것으로 1888년(고종 25) 9권의 국문본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는데, 전체적으로 도선 지향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문학사적으로 이 작품은 서유영(徐有英)의 「육미당기(六美堂記)」, 남영로(南永魯)의 「옥루몽(玉樓夢)」과 함께 19세기 문인들의 소설에 대한 관심도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아울러 조선 후기에 성행한 가문 소설의 국내 창작설에 대한 실증적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저서로는 개인 문집인 『후오지가(後吾知可)』 6권과 일종의 백과사전인 『문시(文時)』 10권 및 소설 「옥수기」 4권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