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흥(順興), 자(字)는 원지(員之). 아버지는 안석(安碩)이며, 형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안축(安軸)이다.
안축에게 글을 배웠기에 그를 아버지처럼 섬겼다. 1320년(충숙왕 7) 문과(文科)인 진사과(進士科)를 거쳐 수재과(秀才科)에 급제하였는데, 고시관(考試官)은 이제현(李齊賢), 박효수(朴孝修)이다. 당시 같은 과거에서 급제한 동년(同年)이 최용갑(崔龍甲)· 윤택(尹澤)· 백문보(白文寶)· 이곡(李穀) 등이다. 경주사록(慶州司錄)에 임명되고, 다시 춘추관수찬(春秋館修撰)을 거쳐 편수관(編修官)을 역임하였다. 1345년(충목왕 1)에 원(元)의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요양행중서성조마겸승발가각고(遼陽行中書省照磨兼承發架閣庫)로 있다가 노모(老母)를 위해 귀국하였다. 이해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이듬해 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를 역임하였다.
그 뒤 우대언겸집의(右代言兼執義)를 거쳐 충정왕(忠定王) 때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52년(공민왕 1)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이어 감찰대부제조전선사(監察大夫提調銓選事)를 지냈다. 1355년(공민왕 4) 밀직제학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 이공수(李公遂)와 함께 안을기(安乙器)· 한방신(韓方信)· 이보림(李寶林)· 염국보(廉國寶)· 이인(李靭)· 우현보(禹玄寶)· 정습인(鄭習仁)·이원령(李元齡)·오사충(吳思忠)· 김구용(金九容)·양이시(楊以時) 등을 진사(進士)로 뽑았으며, 이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려고 하자 고향인 순흥 가까이서 일을 볼 수 있도록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임명되었다. 안보는 형의 묘지명(墓誌銘)을 과거 급제의 동년인 이곡에게 부탁하였다.
음양술(陰陽術)로 길흉(吉凶)을 따지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였다. 또한 『사기(史記)』와 『한서(漢書)』를 즐겨 읽었고, 문장은 화려함을 버리고 실질을 중요시하였다. 일을 할 때에는 대체(大體)에 힘쓰고 조금이라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지 않아 죽을 때 집에는 양식 한 섬도 저축해 둔 것이 없었다.
형인 안축과 함께 안향(安珦)을 제향(祭享)한 순흥(현,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