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향교 ()

안성 양성향교 홍살문 정면
안성 양성향교 홍살문 정면
유적
국가유산
조선 전기, 지방교육 및 교화를 위하여 경기 양성현에 세워진 향교.
유적
건립 시기
조선 전기
관련 국가
조선
소재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교동길 33-4
시도문화유산
지정 명칭
양성향교(陽城鄕校)
분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향교
지정기관
경기도
종목
경기도 문화유산자료(1983년 09월 19일 지정)
소재지
경기 안성시 양성면 교동길 33-4 (동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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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양성향교는 조선 전기 지방교육 및 교화를 위하여 경기 양성현에 세워진 향교이다. 16세기에 대규모로 중건되었으며, 전학후묘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경기도 안성시 소재로 되었으며, 1983년 경기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정의
조선 전기, 지방교육 및 교화를 위하여 경기 양성현에 세워진 향교.
건립 경위

창건 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현의 북쪽 2리에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 15세기 어느 시점에 건립되었다고 판단된다. 양성향교 건립은 조선 건국 후 1읍 1교 원칙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조선의 향교 건립은 지방 인재 양성 및 교화를 위해 시행된 것이었다.

변천

김안국(金安國)의 「양성현중수향교기(陽城縣重修鄕校記)」에 따르면, 1526년 대대적인 재건축이 행해졌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까지 양성향교는 초가였는데,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허물어져 갔다. 이에 따라 기존 장소에서 좀 더 북쪽에 터를 마련하고, 7월 한 달 동안 공사를 진행해 대성전 3칸, 대성전 및 동 · 서재 각 3칸[間], 제기고, 부엌과 주1을 합쳐 6칸을 갖추게 되었다. 또 가운데에 대문을 두었고, 담장을 둘렀으며, 모두 기와를 사용했다. 이후 1774년 중창, 1898년과 1917년 중수되었고, 마지막으로 1985년 중수되었다.

형태와 특징

양성향교는 앞쪽에 명륜당이 있고 뒤쪽에는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를 띠고 있다. 대성전의 지붕 가구는 칠량(七樑)으로 결구되어 있으며,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의 6칸 대청 좌우에 2칸씩의 온돌방이 있다. 16세기 기록과 대조했을 때 전반적으로 규모가 더 커졌다. 아마도 1774년 중창 때 그 규모가 더 커진 것으로 보여진다.

의의 및 평가

조선은 건국 후 향교에 전답과 노비 등을 지급하고 교관을 파견해 교생들을 가르쳤고, 봄과 가을에는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도록 했다. 이는 전국적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유학 이념으로서 백성들을 교화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했고, 그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양성향교는 1983년 9월 19일 경기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모재집(慕齋集)』 권11, 「양성현중수향교기(陽城縣重修鄕校記)」

단행본

『교궁대관(校宮大觀)』(성균관, 2001)

논문

조상순, 「조선 중기 이전 향교건축의 형성과 전개: 관련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성균관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3)
주석
주1

구들을 놓지 아니하고 마루처럼 널을 깔아서 꾸민 방.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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