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석들은 대개 동서이열을 이루고 있었다. 그 중 5기는 괴석형 상석이고 모두 대형 지석이 고이고 있는 남방식 고인돌이었다. 완전한 제7호 고인돌은 대형 지석 6개 위에 괴석형 상석이 올려져 있는 남방식으로 석실은 할석을 3∼4단 정도 쌓았으며, 바닥은 잔자갈이 전면에 깔려 있었다.
고인돌 주위에서 석실 26기가 군집되어 발견되는 등 원래는 3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었다. 이 석실들은 판석으로 짜맞춘 돌널형이 3기, 할석을 쌓거나 세운 돌덧널형이 23기였다. 석실의 군집상태와 방향, 적석상태에서 6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진다. 이것은 적석이 뚜렷한 것에서 개별적인 석실군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석실들은 뚜껑돌이 덮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 파괴되거나 교란된 것이 많으며 원래 상석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상석이 있었다 하더라도 소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비파형 동검 7점, 비파형동모 1점, 대롱옥 5점, 돌검완형이 1점, 편이 2점, 돌살촉 3점, 홈자귀 1점, 턱자귀(有段石斧) 1점, 돌끌 2점, 가락바퀴 1점, 옥마연석 1점 외에 민무늬토기편과 붉은 간토기편이 있다.
제7호 고인돌 석실 바닥에서 출토된 완형의 비파형 동검 1점은 지금까지 여타 고인돌에서 편이나 절단된, 즉 이차전용품이 출토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제2∼1호 돌덧널에서는 파편이지만 완형으로 추정되는 비파형 동검과 비파형동모, 그리고 소형 대롱옥 5점이 일괄로 출토되었다. 특히, 비파형동모가 확실한 유구에서 확인된 것은 처음으로 초기 청동유물에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적량동 고인돌의 연대는 상한을 전형적인 비파형 동검으로 보아 서기전 87세기로, 하한을 유구석부와 소형 대롱옥으로 서기전 4세기로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중심 연대는 서기전 64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적량동 고인돌에서 청동유물이 8점이나 출토되었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며 오히려 요령(遼寧)지방의 초기 청동유물 출토 유적과 비견된다. 또한 고인돌의 부장유물로 동검이 사용되고 있는 점에서 우리나라 청동기문화뿐만 아니라 고인돌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