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1년(영조 7)에 해남에서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173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윤두서와 윤덕희로부터 그림의 재능을 이어받아 가법(家法)을 계승하였으며, 20대부터 화명(畫名)이 알려져 문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화조나 초충도(草虫圖)는 대상의 미세한 부분까지 자세하게 살펴 꼭 같도록 그렸다는 정약용(丁若鏞)의 화평이 전한다. 가전 화풍을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주1과 화보의 방작에서 벗어난 개성적인 필력을 발휘하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안휘파 화풍과 사의성(事意性)이 강한 남종화풍을 추구한 면이 뚜렷하다.
고모부인 신광수(申光洙)는 윤용의 그림에 대해 "우연히 붓을 놀리면 역시 하늘이 낳은 재주라 안개와 구름 싸인 풀과 나무, 화조, 충어, 춘하추동, 깊고 엷고 쓸쓸하고 여유 있는 것들이 모여서 만 가지 변화를 이루어 신묘한 경지를 다하고 허공에 들어갔다."라고 평하였다. 남태응(南泰膺)은 『청죽화사(聽竹畵史)』에 수록된 1732년 글에서 “윤덕희의 아들 윤용 또한 재주가 빼어나 앞으로 나아감을 아직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다만 그 성공이 어떠할지 기다릴 뿐이다.”라고 평하였다.
현전하는 작품은 산수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수각청천도(水閣聽泉圖)」, 「송암청문도(松菴淸問圖)」, 「고사관폭도(高士觀瀑圖)」, 「증산심청도(蒸山深靑圖)」, 「연강우색도(煙江雨色圖)」 등이 대표 작품들이다. 윤용은 풍속화 2점도 남겼다. 그중 「협롱채춘도(挾籠採春圖)」는 윤두서의 「나물캐기」를 재해석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주변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마치 실제 인물을 표현한 듯하다. 시부(詩賦)에도 재능이 있어 「완산악부(完山樂府)」, 「의장십구승(義庄十九勝)」 등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