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李覮)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형(士瑩), 호는 이환(泥丸)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6대손이며, 견양정 이진(李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기(李琦)이다. 아버지는 세마 이언순(李彦諄), 어머니는 최준(崔濬)의 딸이다.
1581년(선조 14) 사마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6년(선조 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영변에서 세자 광해군을 호종하며 활동하였다.
1596년에 사헌부 장령, 세자시강원 필선(弼善), 1597년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재직할 당시 사헌부 장령 유몽인(柳夢寅)과 함께 황정욱(黃廷彧)의 방면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에 정개청(鄭介淸)의 신원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후 선공감(繕工監) 정(正),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고, 세자시강원 보덕을 겸임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1598년에는 승지(承旨), 호조참의, 우부승지, 병조참의 등에 임명되었고, 1599년에는 대사간, 형조참의를 거쳐 1600년에는 황해감사(黃海監司), 1603년에는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임명되었다. 의주부윤 재직 당시 명나라 사신 주경(朱慶)이 공문 없이 왔음에도 법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국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1606년 서장관 유경종(柳慶宗)과 함께 성절사(聖節使)로 사행을 다녀왔다.
1612년(광해군 4) 형조참판에 임명되었고, 1615년(광해군 7) 대사헌이 되었다. 그해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廢母) 논의를 주도하였데, 당시 폐모 논의를 함께 주도한 사헌부 장령 정조(鄭造)와는 사돈 관계였다. 임진왜란 당시 호종한 공로로 '갈충진성동덕찬모좌운위성공신(竭忠盡誠同德贊謨佐運衛聖功臣)'에 책봉되었다. 1616년 병조참판이 되었고, 1618년 완창군(完昌君)에 봉해졌다.
대사간 윤인(尹訒) 등과 함께 이항복(李恒福)이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한 것이 국왕에 대한 불충이라면서, 이항복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킬 것을 주장하여 이항복을 귀양 보냈다. 이후 우참찬에 이르는 등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지만, 인조반정 이후 폐모론을 주장한 핵심 인물이자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평가되면서 죽임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