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397년(태조 6) 대사헌을 지내고, 1399년(정종 1) 중추원사(中樞院使)로서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를 겸임해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다. 1400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오르고, 이어 삼사좌사(三司左使) ·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역임하였다. 이 해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 뒤의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이 되고,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2년 대제학을 거쳐, 이듬해 판사평부사(判司評府事)로서 왕명을 받아 주자소(鑄字所)를 설치,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1405년 육조의 관제가 정해지자 처음으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07년 동북면도순문찰리사 · 영흥부윤이 되고, 이어 찬성사로서 대사헌을 겸임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로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임하고, 1410년 천릉도감제조(遷陵都監提調)로서 덕릉(德陵) · 안릉(安陵) 등을 함흥으로 옮겼다.
1412년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으로 진봉되었고, 1414년 우의정에 제수되어 진하사(進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황희(黃喜)와 함께 충녕대군(忠寧大君: 뒤의 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 성주에 안치되었다. 1422년(세종 4) 풀려 나와 1424년 영의정에 오르고, 이 해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6년 좌의정으로 전직했다가 이듬해 사직하였다. 성주의 안봉서원(安峰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형재시집』이 남아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태조실록(太祖實錄)』
- 『정종실록(定宗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어우집(於于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주석
-
주1
: 직업이나 직무를 바꾸어 옮김. 우리말샘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