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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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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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대장경이나 교장(敎藏)을 판각하기 위해 설치했던 임시 관공서.
이칭
이칭
교장도감(敎藏都監), 대장도감(大藏都監)
제도/관청
설치 시기
고려전기
폐지 시기
조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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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장경도감(藏經都監)은 고려시대 대장경이나 교장 등을 목판에 새기고 인출하기 위해 만든 임시 관청이다. 도감(都監)은 특정 목적을 위해 설치하는 임시 관청으로, 경전을 판각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하였다. 의천의 속장경 간행을 위한 교장도감(敎藏都監)과 재조대장경 판각을 위해 설치했던 대장도감(大藏都監)이 이에 해당된다.

목차
정의
고려시대에 대장경이나 교장(敎藏)을 판각하기 위해 설치했던 임시 관공서.
내용

장경도감은 고려시대 대장경교장 간행을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이다. 경전의 판각과 인쇄를 비롯한 대장경 간행에 대한 전반적인 업무를 관장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적인 대장경 간행이 두 차례, 교장 간행이 한 차례 있었다. 현종~ 선종초조대장경이 간행되었고, 선종 때 의천교장을 간행했으며, 고종 때에는 재조대장경( 해인사 대장경)을 간행했다.

초조대장경 간행을 담당한 관청은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교장이나 재조대장경의 사례를 미루어 보았을 때 간행을 위해 일종의 “도감(都監)”을 운영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특히 현종의 현화사 창건과 북송 개보장 수입 등은 초조대장경과 관련이 커 초조대장경 간행 기구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선종 때 진행된 의천의 교장 간행은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의천은 송나라 유학을 다녀온 뒤 교장 간행을 시작하였고, 1091년(선종 8)에 왕명으로 흥왕사(興王寺)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교장을 간행하였다. 교장도감은 기록에 “교장사(敎藏司)”라고도 전한다.

교장도감에서는 교장의 수집, 목록 작성, 판각과 인쇄 및 보관 등 교장과 관련된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였다. 당시 흥왕사 주지인 의천이 도감을 총괄하고 흥왕사의 자원을 활용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교장 간행에는 일반 관료와 승려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교학에 뛰어난 승려들이 장소(章疏)의 저본을 교감하여 정본을 만들면, 국가의 행정 조직을 활용하여 서자(書者)를 차출하여 판하본(板下本)을 만들었다. 서자로는 비서성(秘書省)이나 사경원(寫經院) 등의 관료들이 참여하였다. 여러 차례 교정을 거친 최종본이 정해지면 각수들이 새겨 인쇄하였다. 장소 4,000여 권을 간행하였으며, 의천은 교장의 목록집인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간행하였다.

교감에는 흥왕사뿐만 아니라 화엄종법상종 계통의 여러 사찰의 승려들이 참여하여 진행되었다. 교장도감에서의 간행 사업은 1101년(숙종 6) 의천 입적 후에도 유지되다가 1102년(숙종 7) 이후 폐지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대장도감(大藏都監)은 고종 대 몽골과의 전쟁에서 고려가 도성을 강화도로 옮긴 후 전쟁에서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자 새로 대장경을 판각하기 위해 세운 관청이다. 1236년(고종 23)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장도감은 수도인 강도(江都)에 본사(本司)를 두었다. 대장도감의 업무에는 승록사승관 등 승려들이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 관료들도 함께 담당하였다. 직제는 고려시대 일반적인 도감(都監)과 유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본사에서도 대장경판을 새기기도 했으나 주로 대장경 조조(彫造)와 관련된 업무 전반을 총괄했고, 실질적인 판각은 주로 지방의 분사(分司)에서 담당하였다. 분사에서 판각한 대장경은 강도로 이관되었다.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은 1243년(고종 30) 전후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남해 분사가 가장 대표적이며, 그 외에 대구, 합천 해인사 등 여러 곳에서 판각이 이루어졌다. 주목할 만한 점은 진주목(晉州牧)에 설치된 분사대장도감을 지방관인 안찰사(按察使)가 겸직하는 사례가 있다는 점이다.

재조대장경 간행은 직접적으로 대장경 판각이 시작된 1237년부터 1247년까지의 11년에 걸쳐 대부분의 조조(彫造)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 1248년에는 대장목록(大藏目錄), 즉 함별(凾別)로 수록된 목록이 완성되었고, 1251년에 대장경 전질의 조조가 완성되었다. 경판은 강도에 보관되었다가 조선 초인 1398년(태조 7)에 왕명으로 합천 해인사(海印寺)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장도감은 재조대장경 판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 존치되었다. 충선왕 때 대장도감이 있었음이 확인되며, 1392년(태조 1) 8월 2일 대장도감 폐지가 논의된 것으로 미루어 조선 초까지도 존속되다 이후 어느 시기엔가 폐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의의 및 평가

고려시대 두 차례 간행된 대장경 판각은 국가적인 불사였다. 대장경 간행은 고려의 호국 불교로서의 특징 뿐만 아니라 문화 국가로서의 위상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재조대장경판은 현존하는 대장경판 중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고, 무엇보다도 정확도가 가장 높다는 점에서 정평을 얻고 있다.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의천이 간행한 교장은 대장경의 주석서를 집대성하여 간행한 최초의 작업이었다. 대장도감이나 교장도감 같이 장경도감은 대장경 간행이나 교장 간행과 관련된 각종 실무를 담당한 곳으로, 불교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도감이라는 관청을 살펴보는 데에도 중요한 기구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조명기, 『고려대각국사(大覺國師)와 천태(天台)사상』(동국문화사, 1964)

논문

강순애, 「고려 팔만대장경의 판각, 봉안 및 판가구성에 관한 연구」(『서지학연구』 20, 한국서지학회, 2010)
박용진, 「高麗時代 大藏經 彫造의 組織과 그 運營」(『한국학논총』 44,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
송일기, 「고려재조대장경의 조성과정 연구」(『서지학연구』 49, 한국서지학회, 2011)
이기영, 「고려대장경의 역사와 의의」(『동국대학교영인본 고려대장경』 제48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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