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본. 유한준의 시문집은 ‘저암집’과 ‘자저(自著)’라는 제목의 두 가지로 전한다. ‘저암집’ 쪽이 보다 후기의 것으로 보인다.
『저암집』은 권1에 부(賦), 권2에 가요(歌謠), 권3∼10에 시, 권11∼12에 전(傳), 권13∼15에 서(序), 권16∼17에 기(記), 권18에 제발(題跋)과 명찬(銘贊)·송(頌), 권19∼20에 서(書), 권21∼22에 잡저(雜著), 권23에 제문(祭文), 권24에 애사(哀辭), 권25∼26에 행장(行狀), 권27에 신도비명(神道碑銘)·묘갈명(墓碣銘), 권28에 묘표(墓表), 권29∼31에 묘지명(墓誌銘), 권32에 첩(牒)·이(移)·첩(帖)·방(榜)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자저』의 권15, 16에 해당하는 방장(榜狀)을 보유(補遺 : 빠진 것을 보태어 채움)로 실었다.
유한준은 기계유씨(杞溪兪氏)의 노론계에 속한다. 연암 박지원의 집안과 혼인관계에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박지원과 긴밀하게 사귀었다. 그러나 박지원 선친의 묘소 문제로 양가에 갈등이 일어났다. 그리고 문학에 대한 관점이 달라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유한준은 박지원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문학론과 달리 법고에 치우친 문학론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유한준의 전(傳) 작품 가운데는 「검객모소전(劍客某小傳)」이나 「예의홍익만전(例醫洪翼曼傳)」처럼 특이한 인물 유형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있다. 명말청초의 소품과 당시의 소품체 산문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은 면이 보인다.
남공철(南公徹)이 지은 제문(祭文)에는 유한준이 남유용(南有容)의 가르침에 따라 『전국책(戰國策)』을 숙독하여 분방함을 체득하였다. 그리고 『예기』「단궁(檀弓)」을 읽고서 문장의 기(氣)와 법(法)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유한준은 평생에 지은 시문 가운데에서 남유용을 위해 지은 하서(賀序)·당기(堂記)·명찬(銘贊)·제문(祭文)이 득의작이라 여겼다고 한다.
『저암집』은 김영호(金泳鎬) 교수 소장의 『저암집』 32권 16책(단 17∼24권과 31∼32권은 빠져 있음.), 규장각 소장의 『자저』 29권 15책(임자년에 이루어진 것이다. 17권 7책의 별본이 있고, 임술년에 이루어진 『속자저』 4책이 또한 별도로 있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의 『자저』 18권 7책이 현전한다.
그 밖에 『자저』에서 초록한 『저암시집』 3권 1책, 『저암집』 2책, 『저암부요(著菴賦謠)』 1책이 규장각도서에 있다. 김영호 소장의 『저암집』은 여강출판사(驪江出版社)에 의해 1987년에 영인되었다. 빠진 부분은 장서각본으로 보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