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1년(인조 9) 2월에 옥천인 조흥빈(趙興賓)과 공주인 한설(韓渫)의 고변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옥천에 사는 권대진이 1629년경 요승(妖僧) 2인 및 몇몇 무뢰한들과 내왕하며 민중을 상대로 황당한 말을 유포시켜 그 행적을 의심받고 있었다.
1630년 정월 그의 아들 계(繼) · 낙(絡) 형제가 조흥빈의 아들 완(浣)에게, “지금 영남과 호남 사이에는 팔대 장수가 있다. 이들이 동시에 군사를 일으켜 장차 큰 일을 도모할 것이다. 이들은 먼저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군사를 일으키는 명분을 왜적이 침입하였기 때문에 저들을 토벌한다는 데 두고 곧바로 서울을 유린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모의에 간여한 권대진 부자를 비롯해 정한, 양천식(楊天植) 형제, 이찬희(李贊希) · 정후암(鄭厚淹), 박선검(朴先儉) 형제 등 16인을 나포해 국문하였다.
역모사건의 주축은 정한 · 김안국(金安國) · 문일광(文日光) · 권대진 · 양시태(楊時泰) · 조철(趙澈) 등으로, 주모자는 정한이며 정인홍(鄭仁弘)의 조카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호서장군(湖西將軍)이라고 하는 김자중(金自重)은 군사를 일으킨 뒤에 장시(場市)에서 난을 일으켜 직산 · 온양 · 천안 등의 관장(官長)을 살해하고 무기를 탈취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1628년 3월에 병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마침 유효립모반사건(柳孝立謀反事件)이 터져 유효립 등이 복주(伏誅)되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다시 1630년 8월 또 일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한회(韓會)의 옥사로 정한의 당여(黨與)들이 많이 죽는 바람에 거병하지 못하였다. 물론, 이들은 거사가 성공하면 정한은 도읍을 진잠(鎭岑)으로 옮길 계획까지 하였다 한다.
이 사건에 승복하고 처형된 사람은 정한 이하 30여인이었고 맞아 죽은 사람은 양시태 등 10여인이었다. 이어 귀양간 사람은 고용후(高用厚) 등 6인이며, 방면된 자는 최현(崔睍) 등 50여인이었다.
연루자들의 공술(供述)에서 드러난 광해군에 대한 이야기 등으로 보아 인조반정으로 실각한 북인 계통의 불만이 표출된 것 같은 느낌이다. 뒤에 고변자 조흥빈은 당상관에 승서(陞敍 : 올라서 서용됨.)되고, 한설은 실직(實職) 6품에 기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