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응순(趙應順)은 함경남도 갑산 출신으로, 이명은 김열(金閱) · 조일비(趙一飛) · 오주(五周) · 왕대방(王大方)이다. 원산에서 행상을 하다 1906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다.
1907년 전재익(全濟益) 의병 부대에 입대하였고, 1908년 5월 함경북도 회령으로의 국내 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1909년 연해주 연추(煙秋) 근교에서 안중근(安重根) 등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였다. 이후 수청(水淸)에서 합성학교 설립에 관여하는 등 연해주 지역의 학교 설립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1910년 6월에는 국민회(國民會) 수청신영지방회(水淸新英地方會)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17년 재중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 대한 참간장(斬奸狀)을 제출하고 처단 실행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나자구(羅子溝)의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 재건을 위한 기금 조성을 주도하였다.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독립단(韓國獨立團)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취임하였다.
1918년에 한인사회당에 입당하였다. 1921년 5월 상하이에서 한인사회당 제3차 대회를 개최하고, 그 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조하였다. 이때 러시아 지역 대표로 참여하였다. 그해 9월 하얼빈에서 한국의용군(韓國義勇軍) 결사대를 조직하여 대장으로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북간도 지역의 11개 단체가 연명으로 서명한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성토문에 노농회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2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1926년 수청 신영동(新英洞)에서 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