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종건(朱鍾建)은 1895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1912년 함흥공립농업학교를 거쳐 1917년 일본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함경남도 도청에서 근무하였다.
1920년 6월 김철수(金錣洙)‧ 장덕수(張德秀)‧ 최팔용(崔八鏞) 등과 서울에서 비밀결사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에 참여하였다. 1921년 5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김철수 등과 함께 사회혁명당 대표로 참석하였다. 대회에서 다른 사회혁명당 출신들과 함께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국내 간부로 선출되었고, 기관지를 주관하게 되었다.
1922년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 1923년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자 물산장려운동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그해 4월 『동아일보』에 「무산계급과 물산장려」라는 물산장려운동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23년 7월 7월 귀국하였고, 같은 해 9월 정백(鄭栢)‧ 이성태(李星泰)‧ 최창익(崔昌益) 등과 함께 민중사(民衆社)를 조직하여 대표로 활동하면서 마르크스의 『임금 노동과 자본』과 『임금‧가격‧이윤』을 번역하여 ‘민중사 팸플릿’으로 출판하였다. 같은 달에는 조선노동대회 준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3월 조선의 사회주의운동 통일을 위해 열린 조선공산당 창립대표회 준비위원회(‘6인회’)에 상하이파를 대표해 참석하였다. 1925년 4월 17일 개최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신의주지방법원과 경성지방법원에서 심리를 받던 중 1927년 9월 병보석으로 출옥한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같은 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공산당 후원회를 조직한 후 모스크바로 가서 국제혁명운동희생자구원회(Mopr)에서 활동하였다.
200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