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 출신. 스스로 구도의 길에 나서 서울 연동교회(蓮洞敎會)의 장로 고찬익(高燦益)과 박승봉(朴勝鳳)을 만나 기독교인이 되었고 고향의 상심리교회(上心里敎會) 설립의 주역이 되었다.
1906년 인근 문호(汶湖)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묘곡(妙谷)의 여운형(呂運亨)에게 전도하여 묘곡교회와 동광학당을 설립하게 하였다.
1911년 양주군 퇴계원(현 남양주시 퇴계원)으로 이주하여 퇴계원교회 장로로 시무하고 이듬해에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졸업하였다. 그 해 경충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1917년에 승동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서울 안동교회 목사 김백원(金百源), 정주교회 장로 조형균(趙衡均), 의주교회 집사 문일평(文一平) 등과 함께 「조선독립애원서(朝鮮獨立哀願書)」를 작성하여 3월 12일 조선총독부에 보낸 뒤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건강이 좋지 않아 목회를 잠시 중단하였다가, 1922년 용산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4년 용산교회를 사임한 뒤 1925년에는 조선 장감연합전도국(朝鮮長監聯合傳道局)의 국장을 역임하였다. 1932년 경기 노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34년에서 1939년까지 양평동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