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상진은 3·1운동 당시 「십이인 등의 장서」를 작성하여 조선총독부에 보낸 장로교 목사이다. 1875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상심리에서 출생하여 1906년 기독교에 입교하고 1907년 세례를 받았다. 1910년 상심리교회 장로가 되었고, 1916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후 승동교회 목사(1917-1922), 피어선기념성경학원 원감(1922-1929)을 지냈다. 1919년 3월 「십이인 등의 장서」(十二人 等의 狀書)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875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상심리에서 태어났다. 서울 연동교회(蓮洞敎會) 장로 고찬익(高燦益)과 박승봉(朴勝鳳)을 만나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상심리교회(上心里敎會) 설립의 주역이었다.
1906년 인근 문호(汶湖)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묘곡(妙谷)의 여운형(呂運亨)에게 전도하여 묘곡교회와 동광학당을 설립하게 하였다.
1911년 양주군 퇴계원(현 남양주시 퇴계원)으로 이주하여 퇴계원교회 장로로 활동하고, 이듬해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하였다. 그해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17년에 승동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서울 안동교회 목사 김백원(金百源), 정주교회 장로 조형균(趙衡均), 의주교회 집사 문일평(文一平) 등과 함께 「십이인 등의 장서(十二人 等의 狀書)」(또는 「조선독립애원서」)를 작성하여 3월 12일 조선총독부에 보낸 뒤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건강이 좋지 않아 목회를 잠시 중단하였다가 1922년부터 1929년까지 피어선기념성경학원 원감으로 재임하였다.
그 외에 용산교회(1922-1924), 양평정교회(1934), 시흥구역(1938), 도림정교회(1939) 목사로 근무하였고, 경기충청노회장(1916), 경기노회장(1931), 장감연합전도국장(1925)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