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익은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태어나 1916년 평양보통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에는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으며, 1923년 돌아와 1928년경부터 유방(柳坊)이라는 필명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해방 이후 1945년 9월, 북한 최초의 문화단체인 ‘평양예술문화협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회장직을 맡았다. 1946년 이후, 최명익은 점차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으며 1956년 「서산대사」, 1961년 「임오년의 서울」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부르주아였던 전력이 문제시되어 숙청되었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최명익은 1928년 홍종인(洪鍾仁) · 김재광(金在光) · 한수철(韓壽哲) 등과 함께 동인지 『백치(白雉)』를 발간하였으며, 유방이라는 필명으로 「희련시대」, 「처의 화장」을 발표했다. 1937년에는 동인지 『단층(斷層)』을 유항림(兪恒林) · 김이석(金利錫) 등과 함께 주관하였다. 그가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 것은 1936년 『조광(朝光)』에 단편소설 「비오는 날」을 발표하고부터로, 광복 전에 중편 · 단편 소설 10편 정도를 발표하였으며, 1947년 을유문화사에서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창작집을 발간하였다.
그는 1930년대 지식인 소설의 대표적인 작가로, 이상(李箱)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심리소설의 지평을 연 작가로 평가된다. 그의 소설에는 무력증과 자의식의 과다에 매몰된 지식인과 속악하다고 할 수 있는 대중적 삶을 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는 두 유형의 인물 대비를 통하여 1930년대의 지식인의 무기력과 절망감 · 소외의식을 강하게 형상화하려고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결국, 그는 ‘어떻게 살아야 인간은 후회없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과제를 추구한 소설가라 할 수 있다.
최명익은 1945년 평양의 문예단체인 평양예술문화협회의 회장을 역임하였으나, 당시까지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가 결정되고, 1946년 김일성이 북한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점차 공산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46년 3월 출범한 북조선문학예술총연맹 중앙상임위원과 평안남도 위원장을 맡았으며, 1946년 말에 이루어진 건국사상총동원운동에 호응하여 직접 함경도 성진구역으로 파견을 가기도 했다. 해방 후 그의 두 번째 소설 작품에 해당하는 「마천령」은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최명익은 1972년 숙청된 이후, 김정일이 1984년 최명익의 유고작인 「이조망국사」를 완성하도록 조치함으로써 복권되었다. 이후 1993년에는 「서산대사」와 「임오년의 서울」이 북한에서 다시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