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지미질금 ()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금관가야 멸망 후 구형왕을 대신하여 식읍을 관리한 인물.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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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탈지미질금은 삼국시대 금관가야 멸망 후 구형왕을 대신하여 식읍을 관리한 인물이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 구형왕의 동기(형제)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왕이 가야를 공격하였을 때 구형왕은 탈지미질금을 본국으로 보내어 머물게 하였고, 여타 왕족들은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신라 법흥왕은 구형왕(구해왕)에게 높은 관등을 주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고 하므로, 탈지미질금이 구형왕을 대신하여 그 식읍을 관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정의
삼국시대 금관가야 멸망 후 구형왕을 대신하여 식읍을 관리한 인물.
가계 및 인적 사항

탈지미질금(脫知爾叱今)에 관한 기록은 매우 부족하여 그에 대해 상세히 알기 어렵다. 다만, 『삼국사기』에 인용된 ' 가락국기'에 그가 구형왕의 동기로 표현되어 있고,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여 신라의 왕도로 가면서 그를 본국에 머물게 하였다고 한다. 동기란 형제와 자매, 남매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므로 그는 아마도 구형왕의 형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만으로 그가 구형왕의 형인지 동생인지 알기 어려우나 신라 왕도로 함께 가지 않고 현지에 머물며 구형왕의 지시를 받는 점으로 보면 동생일 가능성이 더 높다.

주요 활동

탈지미질금의 활동을 알려 주는 기록은 거의 없다. 구형왕이 신라의 대대적 공격을 마주하고 중과부적임을 깨닫고 신라에 항복하면서 탈지미질금에게 명하여 본국에 머물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 조에는 금관국김구해(金仇亥)가 왕비, 세 아들과 더불어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으며, 이들을 예로써 대우하고 상등(上等)의 관등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탈지미질금이 금관가야의 옛 왕도인 구형왕의 식읍에 거주하면서 일정 기간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가락국기'에 보이는 탈지미질금 관련 기사를 대가야 멸망과 관련 지우는 견해가 있다. 즉, 탈지미질금과 도설지(道設智) 그리고 월광태자(月光太子)를 같은 인물로 보는 것이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논문

백승충,「‘가야반(加耶叛)’ 기사의 재검토」(『한국민족문화』 61,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김태식, 「대가야의 세계와 도설지」( 『진단학보』 81, 진단학회, 1996)
문경현, 「가야사의 신고찰-대가야 문제를 중심으로-」( 『대구사학』 9, 대구사학회, 1975)
집필자
이한상(대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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