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세(韓明世)는 1885년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지금의 우스리스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뒤 장학생으로 카잔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이던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제정 러시아 군대에 징집되었고, 만주에서 군 참모부 통역으로 복무하였다.
1905년 8월 군 제대 후부터 1907년까지 연해주에서 농민조합원으로 활동하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3월에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군 사회보안위원회 집행위원, 6월에는 러시아 임시정부 산하 연해주 사회보안위원회 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이후 1920년까지 러시아 지방의회 의원과 토지위원회 · 사회안전위원회 등의 위원을 지냈다.
1917년 가을 나로드니키(Narodniki)의 전통을 잇는 농민적 사회주의 정당인 러시아 사회혁명당에 입당하였다가 1919년 초에 탈당하였다. 같은 시기 대한국민의회 간부를 지냈다.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20년 4월 ‘ 사월참변(연해주참변)’을 피해 아무르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같은 해 6월 아무르주 블라고베셴스크에서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러시아공산당의 조직 사업을 위해 두 차례 하얼빈에 파견되어 조선인 공산주의 비밀단체 결성에 관여하였다.
1921년 초 이르쿠츠크에서 조직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고려부 위원이 되었다. 그해 5월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남만춘(南萬春)‧ 장건상(張建相) 등과 함께 코민테른 제3차 대회 파견 대표자 5인에 선임되었다.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주최로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조선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였고, 레닌과도 회견하였다. 10월에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통합을 위해 베르흐네우딘스크(지금의 울란우데)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 결렬 후 1923년 1월 코민테른 동방부의 코르뷰로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4년 초 코르뷰로가 해체될 때까지 이르쿠츠크파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한명세는 이 시기에 연해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이자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그러나 1929년 러시아공산당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제명당하였다. 그 후 자신의 과오를 비판한 글을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기관지인 『태평양의 별』에 게재하고 복당되었다.
레닌그라드 낙농 콤비나트(kombinat) 교육부장으로 활동 중이던 1937년 9월 13일 ‘첩보 및 파괴 교란 활동죄’로 내무인민위원부에 체포되었다. 그해 12월 3일 소련 검찰과 내무인민위부 합동위원단으로부터 총살형을 선고받고, 12월 10일 형이 집행되었다. 1957년 12월 3일 레닌그라드 군관구 군법회의의 판결로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