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학생운동은 일제강점기 함흥 지역에서 학생들이 전개한 항일 민족운동의 총칭이다. 1919년 함산학우회 주동으로 영생고등보통학교·함흥농업학교·함흥고등보통학교·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과 일반인 등 1,000여 명이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함흥의 학생들은 격렬한 가두시위 등을 감행하였다. 또한 동맹휴학을 전개하여 식민지 교육과 총독정치 철폐 등을 요구하며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대 이후 비밀결사 조직을 결합하여 철혈단(鐵血團)을 발족하는 등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하 한국 학생운동의 일반적인 형태인 가두시위 · 동맹휴학 · 비밀결사 · 문화계몽운동 등의 항일 민족운동을 감행하였다. 가두독립만세시위는 1919년 3 · 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함흥에서도 함산학우회(咸山學友會) 주동으로 영생고등보통학교 · 함흥농업학교 · 함흥고등보통학교 ·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반인 등 1,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같은 해 3월 3일 서함흥 역전에서 전개되었다.
이 날 만세시위로 학생 88명, 일반인 46명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함흥에서의 학생 만세시위는 1929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 때 가장 치열하였다. 광주 지역 학생들의 항일 독립 시위 소식이 알려지자, 함흥의 학생들도 동요되어 같은 해 12월 16일 함흥고등보통학교 · 함흥농업학교 · 영생고등보통학교 ·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궐기하였다.
그러나 함흥고등보통학교와 함흥농업학교의 만세시위는 사전에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30여 명의 학생들이 구속됨으로써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고, 또한 영생고등보통학교와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의 시위 운동도 학교 당국의 휴교 조치에 따라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1930년 1월 11일 영생고등보통학교에서는 아침 조회가 끝난 뒤, 학생 대표가 광주학생들의 민족운동 지원 연설을 하자, 학생들은 시내로 뛰어나와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 시위대는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로 달려가 궐기를 촉구, 양교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격렬하였다.
함흥상업학교 학생들은 영생고등보통학교와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에 자극되어 광주학생운동 지원과 총독정치 반대 투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월 11일에서 14일 사이에 여러 번 회합을 가지고 “모여라! 싸워라! 피압박 민중이여! 삼천리강산을 붉은 피로 화장하더라도 싸워라. 조국을 위해서” 등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1월 14일 조회가 끝난 뒤, 학생들은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교문을 뛰쳐나와 깃발을 휘두르고 격문을 뿌리면서 가두시위를 감행하였다. 그 결과 일본 경찰에 의해 학생 20여 명이 현장에서 붙잡히고 주동 학생 최예진(崔禮鎭) 등 5명이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또한, 민족운동의 한 방편으로 학생들이 학원 내에서 전개한 동맹휴학은 1919년 3 · 1운동 후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추세에 함흥지방의 학생들도 동맹휴학을 통해 좁게는 학원 문제, 넓게는 식민지 교육 · 총독정치철폐 등을 내걸고 민족독립운동을 단행하였다.
함흥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1926년 6 · 10학생운동 후인 1927년과 1928년 사이에 가장 치열하게 일어났다. 1927년 6월 17일 함흥상업학교에서는 2학년생을 중심으로 일본인 교사 배척, 학생의 대우 개선 등 6개 요구 조건을 내걸고 맹휴에 돌입하였으며, 1928년 5월 7일에도 맹휴를 단행하였다.
함흥농업학교에서는 1927년 6월 25일 일본인 교사 배척 등 8개 요구 조건을 제출하고 맹휴에 들어갔으나, 이들의 요구 조건이 관철되지 않자, 1928년 5월 3일 재차 동맹휴학을 감행하였다. 그런데 이들 학교 학생들의 맹휴에 이어 함흥지방에서 동맹휴학을 가장 격렬하게 감행한 학교는 함흥고등보통학교였다.
1927년 7월 2일 함흥고등보통학교 2학년생 약 100명은, ① 일본인 교사 3명 배척 ② 학생 대우 개선 등을 요구하면서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에 7월 4일 3 · 4학년 학생들도 호응하며 맹휴에 참여하자, 학교 당국은 2 · 3 · 4학년 전체 맹휴생에 대해 무기정학을 시켜버렸다. 그러나 학생들은 교내에 격문을 살포하고 맹휴 목적의 관철을 주장하면서 시위에 들어갔으며 학교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내용은 식민지 교육을 비판하면서, 학교는 민족 탄압의 요새이며 교사는 헌병이고 밀정이라고 규탄하여, ① 학교를 자유로운 학문 선도의 장소로 만들 것 ② 무자격 교사의 추방 ③ 1명의 희생자도 처벌하지 말 것 등을 주장하였다. 그 뒤 1928년 5월 초부터 또다시 2 · 3 · 4학년생들이 전년도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에 학교 당국은 5월 14일까지 등교하지 않은 학생은 전원 퇴학시킨다며 위협을 가해 왔지만, 오히려 5월 23일부터는 1 · 5학년생도 동맹휴학에 가세하여 전교생의 맹휴로 확대되었다.
학교 당국은 경찰과 협력하여 학생들의 등교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자, 도학무국과 수습책을 논의하였다. 이에 학무국은 경찰의 적극 개입을 요청하였고, 결국 경찰에 의해 전교생 500명 중에서 50여 명을 검속되고 약 100여 명이 취조를 당하였으며, 이 중 주동학생 이민호(李敏鎬) · 강금봉(姜金鳳) 등 14명은 공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함흥고등보통학교 맹휴 주동학생들은 운동에 통일을 기하기 위해 맹휴생들에게 강력한 통제를 가하는 한편, 선전문을 통해 학생의 위치에서 식민지 차별 교육에 항거하고, 나아가 민족적 차원에서 항일 운동의 전개를 주장하였다. 이 때 국내 각급학교와 재일 한국인 제단체에 보낸 격문에서, ①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획득하자 ② 식민지 차별적 교육을 타도하자 ③ 선일공학에 절대 반대하자 ④ 군사교육에 절대 반대하자 ⑤ 교내 학우회의 자치제를 획득하자 등을 주장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국내 학생들뿐만 아니라 재일본단체들도 적극적으로 함흥고등보통학교 맹휴를 지지하며, 「전조선학생제군에 격함」이라는 격문을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 재일본조선청년동맹 · 신흥과학연구회 등의 3단체 공동 명의로 국내에 발송하여 전국적인 동맹휴학을 선동하였다.
이때 발송된 격문의 주요 내용은, ① 전제 교장을 축출하자 ② 학교와 경찰의 야합을 절대 반대하자 ③ 검속 학생을 석방하라, ④ 교내 자치제를 확립하라 ⑤ 식민지 노예교육을 철폐하라 ⑥ 조일공학제 실시를 절대 반대하라 ⑦ 학생의 전체적 단일체를 수립하라. 등이었다.
함흥 지방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시위운동과 함께 계속 전개되었다. 1931년 1월 26일 함흥농업학교생 140명은, ① 교우회 자치 허용 ② 수업료 인하 ③ 식대 인하 ④ 일본인 교사 배척 ⑤ 희생자 복교 요구 등을 내걸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또, 1931년 5월 16일에는 함흥고등보통학교 3학년생들은, ① 희생자 복교 ② 수업료 철폐 ③ 학우회 자치권 약탈 반대 ④ ××교육제도 절대 반대 ⑤ 학교에 경찰 간섭 반대 등을 요구하면서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그 뒤 맹휴는 더욱 확대되어 5월 21일에는 함흥상업학교생과 연합하여 격문을 살포하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5월 23일 영생고등보통학교 2 · 3학년생의 맹휴가 있었고, 6월 1일에는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2∼4학년생의 맹휴가 잇달았으며, 6월 3일에는 함흥농업학교 2∼4학년생들이, ① 교우회 자치권 허용 ② 수업료 5할 감하 ③ ×××××교육 철폐 ④ 교내 경찰권××을 엄금 ⑤ 실습의 노동화 반대 등의 요구를 내걸고 맹휴에 돌입하였다.
함흥 지방 학생들의 비밀결사는, 1920년대 후반기부터 전국 각급 학교 내에 독서회(讀書會)가 조직되었던 것처럼, 1930년 함흥고등보통학교, 1931년 함흥상업학교에서도 독서회가 사회과학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이어 같은 해 함흥고등보통학교 · 함흥농업학교 · 함흥상업학교 · 영생고등보통학교 ·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등 학생 대표들이 학생공동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1932년 6월 15일을 기하여 대대적인 학생반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영생고등보통학교 학생 78명,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4명, 함흥고등보통학교 학생 6명, 함흥농업학교 학생 2명 등이 구속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940년대에 들어오면서 함흥 학생들의 비밀결사는 더욱 조직화되었다. 1941년 함흥농업학교 졸업생 모리타(守田守成, 창씨명)는 3월 14일 동지들과 협의하여 기존의 비밀결사인 강서친목회(江西親睦會) · 주서친목회(州西親睦會) · 지경친목회(地境親睦會)를 결합, 철혈단(鐵血團)을 발족시켰다.
철현단은 행동 방침을, ‘① 민족의식의 앙양에 노력하고 독립사상의 선전에 주력한다. ② 조선어를 연구하여 이를 애용한다. ③ 조선역사 · 조선어 소설을 구독하여 민족의식을 높인다. ④ 조선인 청년학생들에게 민족주의를 선전하고 동지 획득에 노력한다.’ 등으로 정하고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민족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뒤 1941년 12월 28일 함흥농업학교 졸업식이 끝난 뒤 전개된 시위 항의가 빌미가 되어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으며, 함흥고등보통학교 · 영생고등보통학교 · 영생고등여학교 · 함흥농업학교 · 함흥사범학교 학생 98명이 붙잡히면서, 철현단의 정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1940년 10월경 함흥고등보통학교 5년생 마쓰야마(完山秀雄, 창씨명)가 동급생 3명과 한국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히틀러의 7인조를 모방, 동지 4명을 더 규합하여 동광사(東光社)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1941년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조직원 7명이 붙잡힘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함흥 지방 학생들의 민족운동에 있어서 또 하나의 특징은 민중의 무지를 깨우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문화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는 데 있다. 1920년대 전국적으로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학생들의 농촌순회강연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함흥의 각급학교에서도 이에 적극 가담하여 한글보급 · 농사개량 · 생활향상을 위한 농촌활동에 힘을 쏟았다.
1929년 6월부터 조선일보사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구호 아래 귀향학생문자보급운동을 일으키자 함흥에서도 함흥농업학교 · 영생고등보통학교 등이 이에 적극 가담하였고, 1931년 동아일보사의 학생하기 브나로드(vnarod) 운동을 전개하자 여기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이상과 같이 함흥 지방의 학생들은 식민지하의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줄기차게 다방면에 걸쳐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